
월드컵으로 뜨거웠던 2002년은 국내 맥주산업계에도 기념비적인 해였다. 앞서 대기업만 맥주를 만들고 팔 수 있었지만 그해 소규모 맥주 제조자 면허 신설로 길이 넓어졌다. 이후 이른바 하우스맥주로 불린 소규모 맥주사가 우후죽순 늘어났다. 하지만 당시 법상 해당 맥주들은 외부 출하가 불가능했다. 성장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문을 닫는 하우스맥주 매장이 늘어갔다. 이후 다양한 외국 병맥주를 즐길 수 있는 매장들이 생겨났지만 그때도 맥주 자체는 라거 위주였고 인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천편일률적인 페일라거 외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상황은 2015년 소규모 맥주사도 외부 출하가 가능하도록 법이 개정되며 또 한 번 변혁의 시기를 맞이했다. 곳곳에서 브루어리(양조장)가 문을 열었다. 2016년 1월 탄생한 플레이그라운드브루어리도 그 중 하나였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한다는 도전 정신 아래 성장을 거듭하며 2022년 50억원에 육박하는 매출을 찍었다. 최근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 만난 천순봉 플레이그라운드브루어리 대표는 10년차를 맞이한 올해도 즐거운 도전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맥주를 좋아한 청년, 유학 중 새로운 길을 찾다
대기업(삼성전자)에서 5년간 일한 천 대표는 2009년 훌쩍 미국 유학을 떠났다.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수료한 뒤 코카콜라에 입사, 외국 생활을 이어가면서 종종 낯선 문화에 놀라곤 했다. 그 중 하나가 현지인들은 글로벌 메이저 업체의 맥주가 아닌 지역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를 더 즐긴다는 점이었다. 친척이 현지 브루어리를 운영하고 있던 터라 관심이 더 갔다. 당시 국내 주류법 개정이 확정되자 한국에서 양조장을 열기로 결심했다.
맥주 500㎖를 7~8잔까지 마실 정도로 맥주를 좋아한 천 대표지만 사업은 별개의 문제였다. 주변에서는 기반 없이 양조사업에 뛰어든 그를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정작 천 대표는 자신 있었다. 그는 “한국도 소득수준이 올라가고 탈집단화가 이뤄지며 음주 문화도 바뀌어가는 추세였다. 더 이상 ‘마시고 죽자’로 술을 퍼붓는 것이 아닌 ‘이왕 마시는 거 퀄리티 있는 좋은 술을 마시자’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 캔 테이크아웃, 7.6도 맥주… 파격의 연속
플레이그라운드브루어리의 역사는 곧 파격의 역사다. 문을 엶과 동시에 국내 수제맥주 업체 최초로 캔 테이크아웃 시스템을 도입했다. 방문객이 양조장을 찾아 직접 캔에 맥주를 담아가는 방식이었다. 주변에선 누가 그렇게까지 하겠느냐고 했지만 수요가 적지 않았다. 특별한 홈파티를 위해 수고를 감수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7년 주류법이 바뀌어 편의점과 마트 등 리테일 채널에서도 수제맥주를 팔 수 있게 됐다. 일찍부터 캔 테이크아웃을 시행한 덕분에 법 시행과 동시에 업계 최초로 리테일 채널에 캔맥주를 입점할 수 있었다. 천 대표는 “우리 맥주를 알면서도 구하기가 어려웠던 지방 고객들도 편의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계기였다”라고 말했다. 이후 코로나팬데믹 시기 편의점 매출을 바탕으로 역대 최고 실적을 찍었다.
대표 맥주인 ‘젠틀맨 라거’도 놀라운 도전이었다. 기존 국내 맥주가 알코올 도수 5도 내외에서 벗어나지 않던 시기에 7.6도 맥주를 내놨고 이것이 소비자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천 대표는 “한국인이 즐기는 ‘소맥’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맥주 반 잔에 소주 한 잔을 섞었을 때 알코올 도수로 만든 맥주로, 삼겹살과 족발 같은 한식과 잘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젠틀맨 라거는 안동 하회탈을 콘셉트로 삼았다. 천 대표는 “수제맥주 시장 초기에 한국적 색체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가장 한국적인 게 무엇인가를 떠올리다 찾은 것이 하회탈이었다”며 “하회탈은 총 10가지 종류가 있고 각각 스토리가 존재한다. 그것을 맥주에도 연결해 다양한 맛과 라벨로 골라 마시는 재미를 전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국내 최초로 뉴잉글랜드 맥주인 홉스플래시를 출시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 지속 성장 속 다양한 컬래버레이션
혁신을 바탕으로 성장한 플레이그라운드브루어리는 2018년과 2020년 대한민국 주류 대상에서 다관왕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마트, CU, 롯데마트, 홈플러스, 스타필드 등 채널에서 최상위권 판매량을 기록하고 5성급 호텔과 리조트에도 맥주를 공급했다. 2020년부터 미국, 홍콩, 호주, 중국, 싱가포르로 수출도 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외에서 컬래버레이션 요청이 물밀 듯 들어왔다. 미국 졸리펌킨 양조장을 비롯해 대한항공, 투썸플레이스, 우리카드, 워커힐호텔, 조선호텔앤리조트, SSG 프로야구단, 태극당, FC안양 프로축구단, 생활맥주 등 다양한 업체 및 단체와 손을 잡고 특별한 맥주를 탄생시켰다. 최근에는 미국 브루어리와 함께 6개월 이상 공들인 트로피컬네스트를 출시했다.

천 대표는 “대한항공과 함께 만든 칼스라거(KAL’s Lager)는 기내에서도 서비스 됐다. 브루어리 10년차를 맞아 그동안 주요 연혁을 꼽으라면 베스트3 안에 들어가는 협업”이라며 “국내 가장 오래된 빵집인 태극당과 컬래버도 기억에 남는다. 태극당의 시그너처 단팥빵에 들어가는 팥으로 만든 스타우트 맥주로, 치맥∙피맥을 잇는 빵맥이란 새로운 페어링을 고민하며 탄생한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 “스포츠와 맥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프로스포츠 구단과 협업도 눈에 띈다. 2021년 SSG 야구단과 함께 랜더스 라거를 출시했다. 지난 4시즌 동안 SSG팬은 물론 KBO리그 전체 팬 사이에서 화제가 되며 랜더스 홈구장 직관 땐 꼭 마셔야 하는 맥주로 자리매김 했다.
천 대표는 “미국 유학 당시 스포츠팀 팬들이 지역 양조장이 만든 구단 맥주를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나 역시 야구팬이기도 해서 처음 SSG에서 컬래버 요청이 와서 기뻤다”며 “올시즌 중으로 랜더스 라거를 리뉴얼 출시할 예정이다. 향후 캔맥주를 넘어 구장 내 생맥주 판매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로축구팀 FC안양과도 손잡고 지난해 10월 수카바티 라거를 내놨다. 이 역시 기대를 뛰어넘는 반응에 추가 물량을 3차까지 받았다. 앞서 2023년 프로축구연맹 출범 40주년 기념 맥주도 만들었던 플레이그라운드브루어리는 현재 또 다른 K리그 인기 구단과 협업을 논의 중이다.
천 대표는 “스포츠와 맥주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남성팬 뿐 아니라 여성팬들도 직관을 가면 맥주를 즐기지 않느냐”며 “앞으로도 스포츠 구단과의 컬래버는 항상 원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 앞으로도 ‘믿고 마시는 새로운 맥주’ 목표
어느덧 플레이그라운드는 출범 10년차를 맞이했다. 이는 곧 국내 수제맥주 업계의 역사다. 천 대표는 “한국수제맥주협회 발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국내 전체 맥주 시장에서 수제맥주의 점유율이 5배 성장했다. 하지만 그간 전체 시장의 성장률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족할 숫자는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지나친 욕심을 내서도 안 된다는 게 천 대표의 생각이다. 그는 “맥주는 기호식품이다. 고객의 마음을 잡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며 “지금처럼 정성을 다한 공정으로 품질엔 타협하지 않으면서 소비자를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할 뿐이다. 믿고 마실 수 있는 맥주, 새롭고 다양한 재미를 추구하는 양조장으로서 지위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현재 14종 수제맥주를 제조∙유통 중인 플레이그라운드브루어리는 기존 양조장에서 운영하던 탭하우스를 2023년 고양 일산 시가지로 옮겼고 인천 송도에 2호점도 오픈했다. 신선한 생맥주를 소비자들이 보다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신선한 맥주를 가장 먼저 맛본다, 이보다 좋은 사내 복지가 또 있을까요?”
플레이그라운드브루어리는 천 대표 이하 17명 임직원이 일하고 있다. 대부분 맥주를 좋아해서 입사한 사람들이라 직접 만든 신제품을 가장 먼저 맛보며 품질을 확인하는 업무 자체가 최고의 복지라고 입을 모은다.
반면 맥주 한 잔에도 취하는 ‘알쓰(알코올 쓰레기)’라고 스스로를 표현한 한 직원은 “다양한 수제맥주가 탄생하기까지 과정, 원재료 등을 보고 배우는 것도 재밌다”며 “비록 최대 한 잔 밖에 못 마시는 사람이긴 하지만 우리 맥주가 정말 맛있다는 건 보장할 수 있다”며 웃었다.
회식 때도 직접 만든 수제맥주를 나누며 친목을 도모한다. 한 직원은 “방금 막 만든 신선한 맥주로 회식을 할 수 있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어디가 있겠느냐”며 “맥주 한 잔에 담긴 정성을 공유하며 팀워크도 끈끈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재림 기자 jami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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