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국가가 도와주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역대 최악의 산불사고가 된 최근 경상권 산불에 피해를 입은 건 사람만이 아니다. 수많은 동물이 목숨과 터전을 잃었다. 그나마 사람은 나라가 피해 규모를 파악하고 복구를 지원하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다. 민간단체와 개인 봉사자, 반려동물 관련 산업체가 힘을 모아 재난 속 소외된 존재를 돌본다. 29일 주요 산불 피해지역인 경북 안동시에서 구조·구호 활동 중인 동물단체 연합 ‘루시의친구들’ 관계자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품고 일한다고 말했다.
루시의친구들은 이슈에 따라 5~21개 단체가 힘을 모아 연대한다. 이번 산불사고는 카라, KK9레스큐, 코리안독스, TBT레스큐, 도로시지켜줄개, 라이프에서 약 20명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지난 23일 경북 의성군으로 출동해 24마리 동물을 구조한 뒤 26일 안동으로 이동했다. ㈜이공이공에서 무상 제공한 공간을 베이스캠프 겸 응급진료실로 꾸몄다. 수색팀에서 구조한 동물을 응급처치 후 대형병원으로 이송한다. 모든 치료를 마치면 보호자에게 인계하거나 단체별 보호소로 옮긴다.
◆ 발로 뛰며 수색… “사체가 더 많지만 포기 못해”
수색팀은 2~3인이 조를 이뤄 자체 수색지를 돌거나 제보를 받고 출동한다. 안전을 고려해 화재 진압이 완료된 곳으로 향한다. 전날 경북 내 불길이 모두 잡힌 가운데 이날 총 7팀이 안동 각 지역으로 퍼져 해가 뜨고 질 때까지 피해 동물을 찾아다녔다.

그 중 한 팀(박상욱·유지우 활동가)과 동행했다. 수색엔 왕도가 없다. 발로 뛸 뿐이다. 박상욱 활동가는 “마을주민에게 도움을 받으면 좋겠지만 대부분 화재사고로 힘들고 예민한 상태다. 사람이 죽고 집이 무너지는데 동물이 대수냐는 날선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피해가 커 보이는 마을 위주로 방문해 다친 동물이 있는지 조용히 살핀다”고 말했다.
뼈대만 남고 다 타버린 집, 까맣게 탄 사과들이 흩어져있는 무너진 창고, 주민이 복구 중인 주택을 지나치던 중 골목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발견했다. 사람이 다가가자 놀란 모습이었지만 도망을 치지는 않았다. 화상을 입은 듯 발바닥이 붉었고, 털은 엉켜있었다.

근처 마을회관의 어르신에게 물어보니 개의 주인을 알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활동가는 미리 준비한 유인물을 건넸다. 동물의 상태가 위험해 치료를 위해 이송하니 보호자는 연락 바란다는 내용과 단체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발견한 장소에 유인물을 붙인다고 한다.
강아지를 차에 태운 뒤 근처 다른 마을로 향했다. 검게 그을린 닭장 주변으로 새까맣게 탄 닭 사체 5구가 있고, 그 주변에서 벼슬이 불에 탄 수탉 한 마리가 홀로 울고 있었다. 골목에는 야생 조류의 사체도 있었다.


유지우 활동가는 “수색을 하면 이미 죽은 동물을 더 많이 본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살아남은 동물이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에 찾는 것을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하루에만 루시의친구들은 10마리 이상 개와 고양이를 구조했다. 대부분 끼니도 거른 채 수색에 집중한 덕분이었다.
◆ 현직 수의사들이 응급처치… 대형병원 이송은 개인 봉사자들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동물은 곧장 응급처치를 받는다. 넬동물의료센터(임덕호 대표원장·구상엽 내과 과장), SNC동물메디컬센터(문창훈 원장) 수의사들이 진료를 한다. 고통 받는 동물을 위한 재능기부다. 이들은 “재난 상황에서 가장 소외되는 존재인 동물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며 “병원 진료예약을 한 고객들이 ‘이곳 동물들이 먼저’라며 흔쾌히 이해해주셨다. 감사할 따름”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부분 동물이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피부가 녹아내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육안으로 외상이 심해보이지 않았던 동물도 누렇게 그을린 털을 깎으니 붉은 상처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또 대부분 동물이 연기를 많이 마셔서 호흡기에 문제를 보였다.
응급조치를 받은 동물은 상태에 따라 이곳 베이스캠프 내 쉼터에 남거나 대형병원으로 이송된다. 안동은 24시간 동물병원이 없어서 대구와 수도권의 병원으로 가야 하는 데 이를 위해 개인봉사자들이 나섰다. 전국에서 찾아든 봉사자들이 자차로 동물의 이동을 도왔다.
서울에서 어머니와 함께 내려왔다는 김민정 씨 “반려가족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며 이동봉사 외에도 쉼터 동물의 산책과 청소 등 행정봉사로 온기를 나눴다. 대전에서 방문한 봉사자는 수색 과정에도 동참했다. 무작정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김은정씨도 이날 구조된 강아지의 수도권 병원 이송을 책임졌다.

펫산업 기업 및 브랜드에서는 물품 기부로 마음을 전했다. 페스룸, 레이앤이본, 수퍼빈 등에서 배변패드, 사료, 간식 같은 구호물품을 루시의친구들에 기탁했다. 이효정 도로시지켜줄개 대표는 “많은 분들의 도움 덕분에 구호활동이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다.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 “시민의식 성장했는데… 정부는 8년째 제자리걸음”
김혜란 TBT레스큐 대표는 “3년 전 울진·삼척 산불사고 때와 비교하면 시민의식이 크게 성장했음을 실감한다. 재난 상황에서 개의 존재를 잊지 않고 목줄을 풀어주는 사례가 많이 늘었다. 시민봉사자의 수도 급증했다”며 “그런데 정부는 그대로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려동물은 대피소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의 재난 시 비상대처 요령에 포함된 ‘애완동물은 대피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문구가 근거가 되고 있다. 이에 대피소 입소를 포기하고 반려동물과 차량 안에서 지내거나 다른 공간을 찾는 반려인이 많다. 의성 대피소(의성체육관) 인근에 반려동물 대피소가 마련됐지만 이는 정부에서 만든 것이 아닌 민간단체 동물자유연대가 LGU+ 등과 함께 만든 공간이다.

김영환 카라 정책그룹장은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시대인데, 국가 행정이 시민의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2017년 포항 대지진 사고 이후부터 동물단체들이 반려동물의 대피소 동반 입장 혹은 반려가족 대피소 설치를 정부에 주창하고 있지만 달라진 게 없다. 미국과 일본은 이미 수년 전부터 동물을 위한 대피소를 운영 중”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은 지난 1월 캘리포니아 산불 때 반려동물뿐 아니라 농장동물도 머물 수 있는 대피소를 운영했다.

루시의친구들은 다음달 6일까지 현재 안동 베이스캠프를 유지하며 안동과 경북 청송군·영덕군 등 산불피해 지역의 동물 구조 및 구호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김복희 코리안독스 대표는 “지금까지 약 60마리를 구조했다. 다음주까지 최소 100마리 이상은 구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안동=박재림 기자 jami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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