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부산행’과 ‘서울의 봄’, 넷플릭스 시리즈 ‘중증외상센터’ 등 비호감 캐릭터로만 필모그래피가 한 가득인 김의성은 국내 최정상 악역 전문 배우로 꼽힌다. 김의성은 1년에 3∼4개씩 작품을 꾸준히 공개하며 명품 조연으로서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넘나들며 활약한다.
비호감 캐릭터가 절대 다수인 만큼 캐릭터가 겹쳐 보일 수도 있지만 매 작품마다 대체 불가능한 몰입도를 선사하는 김의성이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맡은 비호감 캐릭터를 주변에 있을 법한 생생한 인물로 구현해냈다.
2일 개봉한 영화 ‘로비’는 연구밖에 모르던 스타트업 대표 창욱(하정우)이 4조원의 국책사업을 따내기 위해 인생 첫 로비 골프를 시작하는 이야기다. 영화 ‘롤러코스터’, ‘허삼관’에 이은 하정우의 세 번째 연출작이다. 김의성은 극 중 원리원칙주의자인 것처럼 굴지만 실제로는 욕망 앞에 흔들리는 정치권 실세 최실장 역할을 맡았다.
프로 골퍼 진프로(강해림)에게 흑심을 품은 최실장은 그녀에게 치근덕거리는 행동의 수위를 점차 높인다. 김의성 스스로도 전작의 비호감을 다 뛰어넘을 만한 비호감이라고 언급할 정도다. 이른바 ‘개저씨’(개와 아저씨의 합성어로 중장년층 남성 중에서 무례하고 권위적인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의 정점인 인물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스포츠월드와 만난 김의성은 “결과물이 제 예상을 좀 뛰어넘더라”라고 웃었다. 이어 “한 사람을 너무 오랫동안 혼자 좋아했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망상이 퍼져서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실수가 나오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며 “최선을 다해서 그동안 좋아해 오던 사람에게 멋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사람을 열심히 연기했는데 결과를 보니까 (최실장이) 예상보다 너무 더러워서 충격을 조금 받았다”고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스크린을 통해 마주한 소감을 밝혔다.
이번에도 비호감 캐릭터의 빌런을 연기하게 됐다. 이미지 고착화에 대한 걱정은 없는지 묻자 김의성은 “이제 와서”라고 답해 웃음을 불렀다. 김의성은 “공백이 있다가 연기를 다시 시작했던 때가 벌써 15년 가까이 됐다. 그때 제가 좋아하는 선배가 당시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저에게 왜 그런 말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미지가 고정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떠올렸다.
이어 “이미지가 무언가로 고정이 된다면 그 다음에 그 이미지를 이용해서 너를 다르게 쓰는 영리한 사람이 또 생길 것이라고 얘기를 해줬다”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미지가 고정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생각이 든다. 대중에게 아무 이미지도 만들지 못하고 있는 배우들이 대부분인데 저는 어떻게든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니까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악역의 이미지가 강렬하긴 하지만 김의성은 SBS ‘모범택시’ 시리즈에선 주인공 편에 서서 악인들을 응징하는 선한 캐릭터로도 존재감을 뽐낸다. 배우로서 악역을 연기할 때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물음에 그는 “쾌감은 악역을 연기할 때가 훨씬 크다. 배우로서 느끼는 만족감이랄까”라고 답했다.
김의성은 “배우 입장에서 연기하는 재미가 있는 캐릭터는 욕망이 강하고 거기서 동기 부여가 돼서 행동으로 옮기는 역할이다. 이런 캐릭터가 사실 훨씬 살아 있는 거니까 그런 모습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며 “저는 조연 배우다. 조연이 욕망이 있고 거기서 동기와 행동까지 연결되는 역할은 대부분 악역이다. 그리고 주인공을 방해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지 않나”라고 웃었다.
이어 “스토리나 주인공에게 영향을 미치는 배역이라는 게 누군가를 심심하게 돕거나 착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보다 배우로서 훨씬 연기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현실에서 볼 법한 최실장 역은 김의성이 아니면 소화하기 어려운 캐릭터로 보이지만 정작 배우 본인은 출연을 오래 고민했다. 실제로 김의성은 캐스팅에 가장 늦게 합류한 배우로 알려졌다. 이유를 묻자 김의성은 “하정우 감독 영화 스타일을 잘 알고 있고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제가 거기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고 그래서 많이 머뭇거렸다. 별것 아닌 배우가 오래 머뭇거려서 죄송스럽더라”라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출연을 결심한 이유로 김의성은 “굳이 영화 스타일에 나를 맞출 필요 없이 오히려 진지하고 정통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용기가 생겼다”고 밝혔다. 아울러 “하정우와는 배우 대 배우, 선후배로서 오랫동안 친분을 갖고 있었다. 이 영화도 사실 굉장히 어렵게 기획되고 촬영에 들어가게 됐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으면 거들어야 된다는 생각도 있었다”고도 덧붙였다.

아무리 악역이어도 배우가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선 최대한 해당 인물에 가까이 다가간다. 김의성은 “인물에 완벽하게 동화하지는 못하지만 가능한 가까이 다가가고 내 안에서 닮아있는 부분을 끄집어내는데 꽤 용기가 필요하다. 부끄러운 것들마저도 꺼내야 하니까 그런 과정을 길게 가져갔다”고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한 과정을 설명했다.
비호감이지만 캐릭터와 닮은 지점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묻자 김의성은 “기본적으로 옳고 그름, 공정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저도 그런 경향이 있다”며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로 유혹에 약한 사람이다. 누구나 유혹에 약한 면이 있지 않나”라고 대답했다.
이어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성격이지만 (캐릭터의) 강점과 약점이 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 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있는 것 같다. 귀여우면서 더러운 것도 저랑 닮은 것 같다”고 웃었다.
영화 산업의 침체와 더불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 시기에 영화를 개봉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계 대선배이자 작품에 참여한 배우의 일원으로서 김의성 또한 어깨가 무겁다.
김의성은 “배우로서 참여했는데 제가 해낸 게 부족해서 영화에 해를 끼치면 어떡하나 걱정이 있다. 전반적으로는 지금 영화 시장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흥행에 대한 걱정도 없을 수가 없다”며 “부디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아주시면 좋겠다. 영화 ‘승부’도 지금 개봉 중인데 두 영화 다 잘 되면 좋겠다”고 영화계 부흥을 응원했다.
그러면서도 “영화뿐 아니라 걱정할 일이 너무 많다. 산불 때문에 고통받는 분들도 많고 정치적으로도 해결될 것들이 빨리 해결이 돼서 평범한 일상을 회복하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이어 “아무래도 한가하게 영화 볼 마음이 잘 안 들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불투명한 상황이 정리가 되고 스트레스도 낮아져서 많은 분이 극장을 찾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좋겠다. 또 이렇게 힘들 때일수록 즐거운 영화를 보면서 웃음을 찾으시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지동현 기자 ehdgus1211@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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