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학자 정약용·윤증·정여창
노블레스 오블리주 원조 류이주
옛 자취 담긴 고택 거닐며 사색
인천 근현대사 품은 '시민애집'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 눈길
가을의 끝자락, 고택이 품은 이야기 속으로 떠나보자. 근현대사의 흔적을 따라 사색을 즐겨도 좋고, 조선의 대학자 집에서 하룻밤 머물러도 좋다. 옛 자취가 새겨진 너그럽고 포근한 풍경이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11월 추천 가볼 만한 곳의 테마는 ‘이야기가 있는 고택’이다. 5곳의 아름다운 고택을 소개한다.
◆정약용의 숨결이 서린 ‘남양주 여유당’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나고 자랐다. 이곳에 그의 숨결이 서린 여유당이 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정약용은 고향으로 내려와 사랑채에 여유당(與猶堂) 현판을 걸었다. 여유는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라’는 뜻이다. 정약용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여유당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정리했다.
선생이 살던 생가는 1925년 대홍수로 떠내려가 1986년에 다시 세워졌다.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며, 다산의 성품처럼 소박하다. 여유당 뒤 언덕에 정약용선생묘(경기기념물)가, 언덕 아래 선생이 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있다. 여유당과 정약용선생묘가 자리한 정약용유적지를 여행할 때는 배우 정해인이 녹음에 참여한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해보자. 운영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월요일, 1월 1일, 명절 당일 휴관), 입장료는 없다.
정약용유적지 건너편에 실학을 주제로 꾸민 실학박물관이 있다.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능내역도 가깝다.
◆인천 근현대사 중심지, 시민의 공간이 되다
‘인천시민애(愛)집’은 인천항 인근 자유공원 남쪽에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사업가가 저택을 지어 살던 곳을 인천시가 매입, 한옥 형태 건축물을 올리고 시장 관사로 활용했다.
이후 인천시청이 이전해 인천역사자료관으로 쓰이다가, 2021년 7월 재정비를 마치고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개방했다. 인천시민애집은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뉜다.
우선 1883모던하우스는 과거 시장 관사를 개조한 근대식 한옥이다. 일본식 저택이 있었을 때 모습을 간직한 제물포정원이 그 주변을 감싼다. 경비동은 인천항과 개항로 주변을 조망하는 ‘역사전망대’로 이용하고, 내부는 전시관 역할을 한다.
고택 주변으로 개항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많다. 개항기 서양인이 사교 모임을 하던 구 제물포구락부(인천유형문화재) 건물이 대표적이다. 대불호텔전시관에는 한국 최초 서양식 호텔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자세히 봐야 더 어여쁜 논산 ‘명재고택’
논산 명재고택(국가민속문화재)은 평생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대 교육에 전념한 조선 대학자 명재 윤증의 집이다. 고택은 안채와 광채(곳간채),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된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조선 양반 주택의 가치에 실용성과 과학적 원리가 돋보이는 한옥으로 꼽힌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뒤에 내외 벽을 설치하고 벽 아래 틈을 둬 안채 대청에서 방문객의 신발을 보고 안주인이 대비할 수 있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 인공 연못, 장독대, 고목 등이 운치를 더한다.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지정된 장소 외 출입을 금한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4시까지. 관람료는 없다.
◆정여창 가문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함양 ‘일두고택’
함양 일두고택(국가민속문화재)은 일두 정여창의 집이다. 성리학의 대가 정여창은 동방오현에 오른 유학자로 평가받는다. 지금 남은 고택은 정여창이 세상을 뜨고 약 1세기가 지나 건축했다. 입구 솟을대문에 정여창 가문이 나라에서 받은 정려 5개가 있다.
사랑채에는 정여창의 후손이 사는 집이란 사실을 말해주는 문헌세가(文獻世家) 편액이 걸렸고, 그 뒤 방문 위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라고 커다랗게 쓴 종이가 붙었다. 누마루에서는 마당에 조성한 석가산(石假山) 풍경이 보인다. 이곳 천장 모서리에도 탁청재(濯淸齋) 편액이 걸렸다. ‘탁한 마음을 깨끗이 씻는 집’이란 뜻이다. 사랑채 옆으로 난 일각문을 지나면 여성의 공간인 안채로 연결되고, 곡간과 정여창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차례로 나온다.
일두고택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함양 남계서원(사적)은 정여창이 세상을 떠나고 그를 기리는 지역 선비들이 세워 함께 둘러보기 좋다.
◆품이 너른 평온한 집, 구례 ‘운조루’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을 담은 운조루(雲鳥樓, 국가민속문화재)는 너그럽고 포근한 고택이다. 1776년(영조 52) 류이주가 낙안군수를 지낼 때 지었다. 250년 가까이 잘 보존된 외관은 물론, 고택에 스민 정신이 면면히 전해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류씨 집안은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새긴 뒤주에 쌀을 채워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이 가져갈 수 있게 했다. 부드러운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는 사랑채 누마루는 운조루의 백미로, 문인들이 풍류를 즐긴 곳이다. 수분실(隨分室)이라는 현판을 걸어 절제 있는 삶을 지향하고, 굴뚝은 낮게 만들어 이웃을 배려했다.
고택을 둘러본 뒤 ‘2023~2024 한국관광 100선’에 든 천은사상생의길과 소나무숲길에서 숲과 저수지를 따라 3km 남짓 걸으며 가을 정취와 깊은 여운을 느껴보자.
정희원 기자 happy1@sportsworldi.com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