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적, 종교, 성별, 나이, 정치의 벽이 하얗게 녹아내렸다. 메이드인코리아 건담, 호주에서 온 강백호, 남자 스머페트, 티라노사우르스, 부처가 한 자리에 모여 긍정 에너지를 함께 만들어냈다. 지난 15일 모나용평 스키장(강원 평창군)에서 열린 이색 이벤트 발왕수플래시는 대통합의 장이었다. 시공간의 제약과 차별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겨울스포츠 마니아들의 화합만이 남았다.
2020년부터 모나용평이 개최 중인 발왕수플래시는 스키, 스노보드, 썰매 등을 타고 눈이 아닌 물을 가르는 이색 이벤트다. 참가자는 눈 쌓인 언덕에서 출발해 가로 15m, 세로 8m, 깊이 80㎝의 물웅덩이를 건너야 한다. 결과는 둘 중 하나다. 스키장이 위치한 발왕산 정상(해발 1458m)에서 솟아나오는 천연암반수 발왕수로 채운 물웅덩이에 빠지거나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연출하거나.

올해 총 100팀이 참가한 가운데 심사위원으로 나선 유인성 모나용평 마케팅본부장은 “물웅덩이를 성공적으로 건넜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관중을 즐겁게 했는지가 우선”이라며 “의상과 퍼포먼스가 중요하다”고 심사기준을 밝혔다. 이 같은 기준은 5년 전 이벤트 출범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보니 이날 참가자 대부분이 눈에 띄는 분장을 하고 있었다. 마치 코스프레 행사장 같은 느낌이었다.
일본의 유명 만화에 나오는 로봇인 ‘건담’이 대표적이었다. 매일 15시간씩 총 보름을 들여서 스폰지 소재로 손수 의상을 만들었다는 변유림 씨는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고 말했다. 메이드인코리아 건담을 향한 사진 요청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 유림씨는 “전부 다 모르는 사람들이다. 평소에는 이런 일이 없어서 신기하다. 연예인이 된 것 같다”며 웃었다.

군복을 입고 얼굴에 위장까지 한 참가자도 있었다. 논산훈련소 육군 조교 출신이라는 노기식 씨는 “민방위도 이미 끝났는데 십수 년 만에 군복을 꺼내 입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가 ‘아빠도 군인이었어?’라고 물어보면서 신기해하더라”며 “물웅덩이를 끝까지 건너고 싶었는데 바로 앞에서 빠졌다. 군 시절 혹한기 훈련보다 더 추운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날 붉은색 해병대 티셔츠를 입은 참가자도 있어 두 사람은 마치 같이 준비한 듀오 같아 보였다.


외국인 참가자도 적지 않았다. 호주 출신 유학생 애런 보티카 씨도 그 중 한 명. 그는 빨간색 가발과 농구 유니폼을 착용한 채 보드를 타고 언덕을 내려와 물웅덩이 앞에서 점프를 하며 미니 농구공을 들고 덩크슛을 하는 포즈를 취했다. 보티카 씨는 “슬램덩크 강백호를 따라했다”며 “지난해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다. 고향인 퍼스(Perth)는 호주의 서쪽이라 스키장이 없다. 한국에서 처음 스키장을 경험하는데 특이한 이벤트가 있어 참가했다고 밝혔다.

부처도 등장했다. 얼굴과 몸을 금색으로 칠하고 동그란 과자(칸쵸)를 여러 개 붙여서 만든 모자를 쓴 김현석 씨는 가부좌로 썰매에 올라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들며 콘셉트를 완성했다. 현석 씨는 “불교인은 아니다. 지난해 핼러윈데이 때 아내가 두 아이를 스님으로 분장시켜서 이번엔 내가 해봤다”며 “가족들이 ‘부처현석’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응원해줬다. 올해 처음 참가했는데 너무 좋은 추억이 됐다”고 말했다.

스노보드 모임 회원이 단체로 참가한 케이스도 있었다. 드래곤볼 손오공(박사무엘), 마스크맨(김기훈), 아바타(박진우), 스머페트(이승규), 발왕산 김치아가씨(신우림), 가오나시(하준호)로 분장해. 우림씨는 배춧잎을 직접 붙인 의상에 지역 특산물 발왕산 김치를 들었고, 머리카락과 눈썹을 노랗게 칠한 사무엘씨는 보드에 노란색 풍선을 붙여 근두운을 표현했다.
설정상 성별이 여자인 스머페트를 남성인 승규씨가 맡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기훈씨는 “다 같이 몰려다니니까 사진 요청이 계속 들어왔다. 사람들은 기쁘게 해준 것 같아 뿌듯하다”며 “그런데 마스크맨 분장이 조금 무서운지 어린 아이들이 내 옆은 피하더라”며 장난스레 울상을 지었다.

영구 분장을 하고 초등학교 6학년 아들과 함께 썰매를 타고 입수한 안정현 씨처럼 가족 단체도 있었다. 그 밖에 토르, 최배달, 자스민 공주, 아이언맨, 텔레토비 같은 전 세계의 인기 캐릭터로 분한 참가자,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표현한 참가자, 해녀 복장을 하고 생태와 미역을 든 참가자, 야구팀 NC다이노스 유니폼과 마스코트 털모자, 응원봉으로 꾸민 참가자, 티라노 사우르스 공룡 의상을 입고 나선 참가자, ‘탄핵’이라는 문구가 써진 의상을 입고 ‘찬’, ‘반’이라는 팻말을 양 손에 든 사람도 눈에 띄었다.
플라스틱 박스와 생수통 등으로 직접 만든 봅슬레이를 준비한 참가자도 있었는데 마음처럼 눈 언덕에서 잘 미끄러지지 않자 봅슬레이를 직접 들고 입수해 큰 박수를 받았다.
평창=박재림 기자 jami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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