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 셔먼 10개 작품 선봬
분장·카메라 구도·빛 등 활용
피사체로 다양한 인물 표현
코·가슴 등 보형물 넣어 작업
명화 모방·풍자한 연출 ‘눈길’
“나는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이려고 하는 행동에 아주 넌덜머리가 난다.”
50년간 스스로를 피사체로 자신만 카메라에 담은 아티스트가 있다. 바로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초상사진의 아이콘 신디 셔먼(69)이다. 노장의 사진작가는 수십년간 자신을 피사체로 삼되,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표현해 사진에 남겼다.
그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젊은 여성에서 명화 속 수도승으로 변신한다. 셔먼은 분장, 카메라 구도, 빛의 힘을 빌려 다양한 인물을 표현해왔다. 자화상을 찍는 작가는 많지만, 본인이 다른 사람으로 변해 피사체가 되는 작업을 하는 작가는 셔먼이 거의 유일하다.
신디 셔먼의 50년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전시 ‘온 스테이지-파트 II’가 9월 17일까지 루이비통 메종 서울 4층에 있는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서 펼쳐진다.
작품 수는 총 10점. 작품수가 많지 않지만 작가의 예술 세계를 광범위하게 보여준다. 셔먼의 1979년도 첫 연작인 ‘무제 필름 스틸’부터 ‘역사 초상화’ ‘광대’ ‘남성’까지 굵직한 시리즈를 통해 셔먼의 작품 세계를 압축했다.
이왕이면 예약 후 도슨트와 함께 돌아보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다양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셔먼의 작품세계의 구축 히스토리를 자세히 들어볼 수 있어서다. 24일,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을 찾아 신디 셔먼이 표현한 ‘10개의 초상’을 만났다.
◆비탄에 빠진 B급 영화 여주인공… ‘이름을 알리다’
전시에 들어서자마자 마스카라가 얼룩질 정도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여성이 보인다. 이는 셔먼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시리즈인 ‘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s)’ 중 27번 작품이다. 시리즈는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이어졌으며, 총 69점의 흑백필름 작품으로 구성됐다.
‘스틸’은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되는 이미지다. 이와 관련 셔먼은 자신을 B급 누아르 영화에 등장하는 여배우처럼 꾸민 다음 사진을 찍었다. 지금이야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게 흔한 일이지만, 50년 전엔 ‘파격’이었다. 이와 관련 미국 뉴욕 모마미술관은 ‘셔먼의 작품들이 1977년도 이래 아주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고 평가하며 1996년 그의 시리즈 69점을 전부 구매하기도 했다.
◆패션계가 열광한 ‘아름답지 않은’ 패션 필름
1970년대, 셔먼의 사진이 흑백 세상에서 1980년 컬러의 세계로 나온다. 당시 셔먼이 자신만의 패션 사진을 통해 자신만의 해학과 풍자를 이어간 사진을 만나볼 수 있다. 장 폴 고띠에와 꼼데가르송을 입은 셔먼이 보인다. 당시 셔먼이 의상 홍보를 맡게 되면서 만든 작품이다.
셔먼은 과거 “나는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이고자 하는 것에 아주 넌덜머리가 난다”고 밝힌 바 있다. 패션 시리즈에서도 ‘패션 사진’ 하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은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우스꽝스럽거나 병약해 보이는 모습으로 풀어낸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오히려 열광했다. 지금도 디자이너와 세계적 매거진은 신체의 규범과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콘셉트를 전달하기 위해서 셔먼과 지속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그림이야, 사진이야?… ‘자연스러움이 진정한 아름다움’
패션사진 다음에는 마치 미술관에 온 것 같은 작품인 ‘역사 인물화(History Portraits, 1989~90)’ 시리즈가 기다린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 초상화인데, 어딘지 다르고 기괴하다.
셔먼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믿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히려 비틀고 꼬집은 역사 인물화 시리즈를 제작하게 됐다.
과거 전통적인 초상화들은 인물에 이상화된 모습을 함께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이렇다보니 포즈가 정형화되고, 배경은 엄숙하며, 작품의 크기는 클수록 좋았다. 셔먼은 이상화된 모습들이 얼마나 인위적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과장’을 사용했다.
거장이 그린 초상화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들, 자세히 보면 어색한 ‘장치’가 설치돼 있다. 르네상스 대표 화가인 라파엘로의 ‘라 포르나리나’를 패러디한 작품에는 가슴 보형물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초상화를 흉내낸 작품에선 매부리코를 활용했다. 셔먼은 작품 속에서 일부러 보형물을 활용한 티가 나도록 의도, 명작의 권위를 흔들었다. 특히 ‘측면 초상화’는 약점을 가리기 위해 제작된 방식이다. 다만 셔먼의 측면 초상화에는 인공 보형물로 ‘매부리코’라는 여성의 약점을 도드라지게 표현해 눈길을 끈다.
◆진화하는 셔먼의 사진 세계
“이 중년 남성도 셔먼이라고?”
이번 전시의 대표 사진이자 전시 포스터로 사용된 ‘남성(2019)’도 꼭 봐야 할 작품으로 꼽힌다. 패션 시리즈에서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스트레오타입’을 깨뜨리는 작업을 진행했다면, 남성 시리즈에서는 대중 매체가 흔히 보여주는 ‘호전적이고 강한’ 남성의 모습을 깨뜨렸다. 마치 옆집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편안한 중년 남성의 모습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영국 디자이너 스텔라 메카트니와 협력한 것이다. 당시 셔먼은 스텔라 매카트니의 신상 남성복 재킷을 입고 속에는 80년대 작업했던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받쳤다. 남성으로 분장하면서도 여성인 자신을 의도적으로 녹인 셈이다. 뒷배경은 셔먼이 유럽·아시아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찍은 풍경을 데칼코마니로 만들어 디지털 합성했다. 예전 촬영 방식만 고집하지 않고, 사진 기술의 발전에 따라 작품도 진화시킨 면모가 엿보인다.
전시의 마지막 작품은 신디 셔먼의 ‘광대 시리즈’ 중 한 작품이다. 셔먼이 2003년 보그 런던에서 게스트 에디터로 근무할 당시 제작됐다. 내가 누군지 알려주는 초상화 방식을 차용하되 짙은 화장과 몸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익명의 피에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는 셔먼이 디지털 방식을 맨 처음으로 사용한 작품 시리즈이기도 하다.
◆셔먼이 보여주는 다양한 정체성… 시작은 ‘어린시절’
신디 셔먼이 다양한 사람들을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진 정체성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셔먼은 5명의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형제들과 19살, 9살 등 나이차가 굉장히 크다보니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때 셔먼은 ‘상상 속의 인물’로 분장하고, 생각하는 것을 즐겼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되고 싶어하는 상상 속 인물은 보통 공주, 요정, 발레리나 같은 것이다. 하지만 신디 셔먼은 특별했다. 할머니나 괴물로 분장하는 데 즐거움을 느꼈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같은 ‘상상 속 인물들’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이어졌다. 뉴욕 버팔로 주립대학의 회화과로 진학한 셔먼은 개념미술 작가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사진으로 전향했다. 당시 뉴욕에 있는 아티스트 스페이스라는 곳에서 리셉셔니스트로 근무할 때에도 ‘비서 분장’을 하고 출근하는 비범한 여성이었다. 자신의 10∼20대 시절 사진을 담은 ‘신디 북’이라는 사진집을 만들기도 했다.
셔먼의 카메라는 어떤 대상이든 한계를 가리지 않는다. 스스로 여성과 남성, 현대와 과거, 인간과 사물,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을 비튼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전시는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서 오는 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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