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월드=최원영 기자] 운동과는 상극이던 아이가 자라서 여자프로배구 국가대표 센터가 됐다. 양효진(31·현대건설)의 이야기다.
20년 전 부산 수정초등학교. 운동회가 한창인 가운데 개인 줄넘기 종목에서 탈락한 아이들이 운동장 한편에 모여 앉았다. 그중 눈에 띄게 큰, 신장 170㎝를 자랑하는 학생이 있었다. 4학년 양효진. 그에게 한 선생님이 다가와 “너 배구해볼래?”라고 물었다. 양효진은 속으로 ‘내가 운동이라니. 말도 안 돼’라고 생각했다.
운동에 관심도, 소질도 없었다. 몸에 기력이 없어 스스로 “걸어 다니는 것도 신기할 정도”라고 표현했다. 다른 친구들이 운동장 열 바퀴를 뛸 때 겨우 한 바퀴를 채웠다. 운동선수와는 여러모로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취미 삼아 해보라는 권유에 방과 후 배구반에 들어갔다. 양효진은 “어느 날 정신 차려보니 엘리트 반에 속해있더라”고 회상했다.
열심히 했지만 내 길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는 “몸이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스트레스가 컸다. 6학년 때, 중학교 진학 전 배구를 그만뒀다”며 “장래희망이 교사였다. 뒤처진 진도를 따라잡으려 과외를 받고 밤새워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유망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주위에서 설득에 나섰다. 양효진을 처음 배구의 길로 인도했던 선생님의 선생님까지 뛰어들었다. 집으로 찾아와 새벽까지 간곡한 부탁을 이어갔다. 배구를 계속하면 무조건 실업팀에 갈 거라고 장담했다(당시엔 프로팀이 없었다). 양효진은 “가끔 선생님을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한다. 난 끝까지 울면서 안 하겠다고 버텼다. 선생님 덕분에 지금까지 배구를 하게 됐다. 감사하다”고 미소 지었다.
재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양효진은 “기초 체력은 부족했지만 볼 감각이 좋았다. 어렵지 않더라. 금방 늘었다”며 “대회에 나가면 중학생 언니들이 내게 잘한다고, 타고났다는 칭찬을 자주 해줬다”고 밝혔다. 그는 “운동하면서 내성적이던 성격이 외향적으로 바뀌었다. 자존감이 낮았는데 활발해지며 달라졌다”고 웃었다.
부산여중에 입학해 다시 배구공을 잡았다. 그때부터 ‘반드시 운동선수로 성공해야겠다’는 다짐을 마음에 새겼다. 운동에 대한 두려움을 없앴다. 흥미를 느꼈고 배구의 매력에 빠졌다. 초등학생 때부터 해온 센터를 자신의 포지션으로 굳혔다.
남성여고에 진학해 고민이 생겼다. 팀 상황이 어려웠다. 선수가 부족했고 대회에도 잘 나가지 못했다. 운동을 쉬고 있는 일반 학생들을 데려와 겨우 최소 인원 7명을 맞췄다. 양효진은 “내 배구 인생이 여기까지인가 싶었다. 팀 성적이 나야 하는데 잘 안 되니 너무 힘들었다”고 돌아봤다.
2007~2008시즌 KOVO 여자 신인선수드래프트. 남성여고 양효진은 1라운드 4순위로 현대건설의 지명을 받았다. 그는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프로 초년생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다. 양효진은 “넘어야 할 산이 무척 높아 보였다. ‘난 못하는 게 왜 이리 많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며 “해야 할 게 산더미였다. 훈련량이 많아도 그저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밖에 없었다”고 추억했다.
독기를 품었다. 재능에 노력까지 더하자 금세 꽃이 피었다. 양효진은 2009~2010시즌부터 블로킹상을 독식했다. 베스트7이 신설된 2014~2015시즌부터는 매년 센터 부문 트로피를 차지했다. 10시즌 연속 블로킹 1위 행진 중이다. 지난 시즌에는 남녀부 최초로 개인 통산 블로킹 1200개(1202개)를 돌파했다. 센터지만 득점 부문 전체 6위(429점), 공격 1위(공격성공률 43.70%)에 올랐다. 팀을 선두로 이끌었다. 생애 첫 정규리그 MVP의 영예를 안았다. 여자배구 8시즌 연속 연봉 퀸이다.
태극마크도 달았다. 2012 런던올림픽,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2020 도쿄올림픽 예선전과 2010 광저우·2014 인천·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까지 수차례 대표팀에 승선했다. 국제무대를 마음껏 누볐다.
정상에 오르고도 한동안 ‘쉼’을 몰랐다. 그는 “약 10년간 배구에 몰두해서 살았다. 앞만 보고 달렸다”며 “어느 날 돌아보니 어릴 때 꿈꾸던 것들을 이뤄냈더라.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했다”고 했다.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양효진은 “항상 압박감, 중압감을 짊어지고 살았다. 나를 너무 기계처럼 다뤘다. ‘이렇게 하다간 배구선수 양효진 외에 인간 양효진은 죽어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모든 걸 너무 움켜쥐려고만 하면 안 되더라. 충분히 노력하고 그래도 안 되는 것엔 죽도록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고 터놓았다.
은퇴할 때까지 ‘프로답게’ 코트 위에 서는 게 마지막 목표다. 그는 “내 이름에 맞는 기량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며 “실력을 떠나 배구를 향한 열정, 진심만큼은 항상 최고이고 싶다. 프로 정신이 정말 대단했던, 사람도 참 좋았던 선수로 남았으면 한다”고 진심을 내비쳤다.
새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여느 때처럼 구슬땀을 흘린다. 양효진은 “나이가 들고 몸이 아파도 더 열심히 뛰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어릴 때부터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주신 팬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라며 “코로나19를 잘 이겨내 경기장에서 다시 팬분들을 뵙고 싶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yeong@sportsworldi.com 사진=선수 제공,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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