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거신 전화는’이 K-드라마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며 막을 내렸다. 원작 웹소설의 흥미로운 각색, 이를 뒷받침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백사언의 순애보를 독차지한 홍희주 역의 채수빈도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지난 4일 종영한 MBC 금토드라마 ‘지금 거신 전화는’은 동명의 카카오페이지 인기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 협박 전화로 시작된 ‘정략결혼 3년 차’ 쇼윈도 부부의 시크릿 로맨스릴러를 그렸다.
극 중 채수빈은 함묵증을 앓고 있는 수어 통역사로, 국민의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는 백사언의 아내 홍희주로 분했다. 어린 시절 상처를 안고 마음의 문을 닫았지만 소용돌이 치는 사건의 중심에 서며 주체적으로 변모한다. 8일 본지와 만난 채수빈은 “’사주커플(백사언-홍희주 커플)’의 이야기가 많은 사랑을 받게 되어 신기하고 감사하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에서 반응 좋아서 더 신기한 마음이 든다”고 종영 소감을 전했다.
지난해 11월 첫 방송 된 ‘지거전’은 두 차례 결방에도 상승세를 지속하며 최종회는 8.6%(닐슨코리아, 전국기준)의 시청률로 자체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넷플릭스에서 동시 공개돼 첫 방영 후 전 세계 78개국 넷플릭스 톱10(TV쇼 비영어 부문)에 올랐고, 지난달 첫 주 넷플릭스 글로벌 전체 2위까지 올라섰다. 드라마의 인기는 원작을 향한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거액의 제작비가 투자된 장르물들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의 성적을 냈다.
예상 밖의 인기에 채수빈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로맨스지만 판타지스러운 면도 있는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츤데레 같았지만 큰 사랑을 품고 있었던 사언의 순애보가 여성분들에게 행복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인기의 비결을 점쳤다. 이어 “최근 SNS에서 단체 관람하는 영상을 봤다. 사언과 희주의 재회를 월드컵 경기 보듯 관람하시더라.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이렇게 환호를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이렇게 사랑을 받는다는 게 기분 좋았다”고 말했다.
채수빈이 바라본 홍희주는 억압된 삶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수동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희주의 똘기가 묻어나왔다. 희주의 당찬 매력에 망설임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
선택적 함묵증. 정략결혼의 피해자로 숨겨진 결혼 생활을 영위했다. 납치를 겪으며 어설픈 협박을 시작하고, 우여곡절 끝에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 그는 극중 희주의 변화에 관해 설명하며 “납치를 당했는데 남편이라는 작자에게 ‘시체가 나오면 연락해’라는 말을 들어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1화에서 ‘이 X새끼가’라는 말로 처음 입을 트는데, 이전에는 희주의 목소리가 나레이션으로도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고민을 많이 했었다”고 설정에 관한 고민도 털어놨다.
평소 문자보다 전화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런 내가 폰으로 소통하려니 얼마나 답답했겠나”라고 투정을 부리면서도 “소통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희주의 마음이 되어 둘이 평범하게 살아갈 수는 없나 싶기도 했다. 조금 행복해지려나 보면 문제가 생기더라. (시청자와) 같은 마음으로 희주를 응원했다”고 답했다.
자연스럽게 수어를 구사하기까지도 많은 노력이 있었다. 촬영 두 달 전부터 수어 선생님에게 수업을 들었다. 실제 방송에 노출된 장면보다 더 많은 수어 분량을 소화해야 했고, 완벽하게 익혀야 표현이 수월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열심히 준비한 영국 대사관 신은 ‘국제 수어’가 필요했고, 뉴스 통역도 일상 언어와는 다른 수어가 필요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당시엔 힘들었지만, 더 다양한 표현 방식을 배워서 능숙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지나고 나니 아름답게 보인다”고 말했다.
수어는 손뿐만 아니라 얼굴도 표현 요소 중 하나였다. 볼에 바람을 넣어 표현하는 방식도 많았고, 입 모양이나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기도 했다. 함묵증을 연기해 했던 그에게 ‘답답함’은 불가피했다. 말할 수 없던 희주가 억압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설정도 자연스레 이해했다. “선택적 함묵증이라는게 아이들이 많이 걸리는 거라고 들었다”며 “정말 말을 하고 싶어도 자기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 아니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 희주는 그렇게 살아왔던 거다. 연기하면서도 어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홍희주로서 백사언은 처음엔 나쁜 사람이었지만, 조금씩 마음을 알아가면서부터는 많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배우 채수빈으로서 유연석은 세심함이 빛나는 선배였다. 무더위에 산에서 촬영하는 날이 오면 아이스크림을 100개 넘게 사 와서 스태프들을 나눠줬다고. 상주에서 촬영할 땐 트럭을 빌려 곶감을 선물하기도 했다. 지방 촬영에서는 배우들의 단합을 위해 식사를 대접하고, 모자를 만들어 스태프들과 나누기도 했다.
인아(한재이)의 등장이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었지만, 희주의 든든한 아군으로 극을 마쳤다. “대본을 봤을 때도 ‘뭔가 있나?’하는 생각을 했는데, 언니가 많이 도와주더라. 사실 그 감정이 어려웠다. 언니로 인해 이 결혼 생활을 하게 되는 건데, 언니가 한 번에 용서가 될까? 마음이 열릴 수 있을까? 싶기도 했는데 따듯하게 잘 마무리된 것 같다”고 자매의 관계성을 짚었다.
엄마 연희(오현경)와의 모녀 갈등도 눈물의 사과로 급하게 봉합됐다. 이를 두고 채수빈은 “엄마도 희주를 진심으로 사과했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잘 못 됐던 것 같다. 희주는 사언을 만나서 사랑받는 게 이런 감정이구나 하는 걸 느낀다. ‘지난 일은 다 잊겠다’는 희주의 대사도 사언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원작에 있는 설정을 12부작에 다 담아내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배우인 나도 이 감정들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된 12부였다”고 돌아봤다.
2013년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로 데뷔해 13년 차 배우다. 촬영장 막내에서 어느 순간 ‘선배님’ 호칭을 듣는 연차가 됐다. ‘지거전’을 향한 시청자의 관심에 배우 채수빈도 다시금 조명받았다. 드라마 ‘여우각시별’, ‘로봇이 아니야’, ‘반의반’, ‘더 패뷸러스’ 등 주연작을 맡아왔지만 이번 작품으로 ‘팔척토끼’라는 애칭이 생길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
재밌는 대본을 보면 고민 없이 도전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시청률’을 잣대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덜컥 겁이 생기면서도 조금 더 신중해져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지상파 드라마를 하기가 무서웠고, 그래서 OTT를 택하기도 했다”고 답했다. 작품의 수는 많아지고 매체도, OTT의 종류도 많아지고 있다. 급변하는 환경을 따라가기 버겁기도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작품이 주는 메시지에 집중해서 작품을 선택하고자 한다.
“‘지거전’이 로맨스릴러 장르를 다뤘으니, 더 스릴러에 집중된 작품을 해보고 싶기도 해요. 완전 코미디도 도전해보고 싶죠. ‘SNL 코리아’ 촬영이 너무 재밌었던 기억이 나요. 김상중 선배님이 추천해 주셔서 나가게 됐는데, 연극을 하는 느낌이었어요. 처음엔 걱정도 많이 했지만, 대본 리딩하고 호흡을 맞추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실제 관객을 초대해서 라이브로 방송되는 것까지 너무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채수빈은 “20대 때는 마냥 연기하는 게 즐거워서 모든 작품이 행복했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하지만 연기는 알면 알수록, 하면 할수록 어려웠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배우로서 대사를 뱉지 못한다는 설정, 상대역을 보지 않고 전화로 그려가야 한다는 부담감 등을 견디며 한 층 더 성장했다. 다음엔 지금보다 능숙하게 어려움을 헤쳐가리라 믿으며 작품을 마쳤다.
“힘들지 않으면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없다”고 하던 선배들의 말을 곱씹으며 더 치열하게, 더 좋은 배우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란 무엇일까. 이 같은 물음에 채수빈은 “우리는 인물을 통해서 이야기 전달한다. 대중이 더 공감하고 납득할 수 있게 ‘진짜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가 좋은 배우인 것 같다.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정가영 기자 jgy9322@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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