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때문에 늘 괴로웠지만, 그만큼 진심이었고 사랑했어요.”
여자프로농구(WKBL) 새 역사가 탄생했다. 주인공은 하나은행의 베테랑 포워드 김정은이다.
순탄한 길만 걷지 않았기에 눈길이 더 간다. 단순 대기록이 아닌, 숫자 그 이상의 가치를 남겼다. 프로 데뷔 20년차에 WKBL 통산 득점 1위로 올라섰다.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올라선 고지다. 지난 시간을 돌아본 선수 본인 역시 “파란만장했던 농구인생이었다”며 남다른 소회를 털어놓았다.
‘살아있는 전설’이다. 김정은은 2006 WKBL 신입선수선발회서 신세계의 전체 1순위 지명으로 프로 무대를 밟았다. 2005년 12월 21일 삼성생명전에 열여덟 나이로 데뷔해 곧장 첫 득점을 올렸다.
이후 우승 반지 3개를 거머쥔 선수로 성장했다. 2017~2018시즌에는 우리은행 유니폼을 입고 맹활약하면서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한 바 있다. 무엇보다, 득점 기록과 유독 인연이 깊다. 1000득점을 제외하면 2000득점부터 8000득점까지 각 1000점을 모두 최연소로 기록했다. 정규리그 득점왕에는 4차례 올랐다.
마침내 화룡점정을 찍었다. 2일 홈 부천체육관에서 열린 ‘하나은행 2024~2025 여자프로농구 정규리그’ 3라운드 하나은행과 삼성생명의 경기, 1쿼터 시작 25초 만에 2점 슛을 성공시키면서 최다 득점 1위에 등극한 것. 이날 김정은은 8점을 추가하면서 8147점째로 정선민 전 국가대표팀 감독(8140점)의 종전 1위 기록을 넘어섰다.
다만, 대기록 달성에도 크게 웃을 수 없었다. 소속팀인 하나은행이 삼성생명에 48-67로 대패하면서 진한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팀은 올 시즌 정규리그 3승8패로 다소 부진한 성적을 기록 중이다.
경기 뒤 김정은이 “그간 20년을 뛰었지만, 불만족스러운 경기력을 보이면 여전히 고통스럽다”며 “대기록 달성의 기쁨보다는 팬들께 죄송한 마음이 크다”고 복잡한 마음을 표한 까닭이다.
이어 “스스로에게 되게 엄격한 편”이라고 운을 뗀 그는 “내 경기력에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나 자신에게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수많은 득점을 돌아본 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는 7000점부터 8000점까지 도달했던 시기를 꼽았다. 2020년과 2024년 사이다.
이때를 떠올린 김정은은 “모든 걸 다 걸고 뛰었다. 영혼까지 쥐어짰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면서 “부상에 많이 시달렸고, 병원에서는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 당시에는 나도 은퇴를 고민했었다. 그런 시기를 끝내 이겨내고 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부상 외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굴곡진 농구 인생을 두고 파란만장했다고 자평할 정도다. “구단 해체도 겪어봤고, 프랜차이즈 스타였다가 쫓겨나듯 이적도 해봤다. 처음 진출했던 챔피언결정전은 사기극으로 끝났다”며 쓴웃음을 보였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결국 농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김정은은 “농구 때문에 늘 괴로웠다. 나이를 먹어서도 ‘농구를 이렇게까지밖에 못 하나’ 화가 많이 난다. 그래서 더 잘 버텨낸 듯하다. 항상 괴로우면서도 농구에는 진심이었고, 또 농구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끝으로 후배들을 향한 애정 어린 메시지를 전했다. 20년의 커리어 동안 MVP와 우승 등 최고 영예를 누린 가운데 가장 값진 경험은 따로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선민, 전주원, 박정은, 변연하 등 여자농구 전설들과 코트 위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경험이다.
“신인 때부터 기라성 같은 언니들과 함께 뛰었다는 점이 내겐 가장 큰 자부심”이라는 김정은은 “좋은 영향을 받았기에 나 역시 그런 선배의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또한 “선배들이 길을 잘 다져놓았다. 우리 후배들이 그만큼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치열하게 분발했으면 좋겠다. 나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코트 위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부천=김종원 기자 johncorners@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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