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의 ‘반상(盤上) 혈투’, 뜨겁게 마침표를 찍었다.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는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바둑 대회로 1996년 출범해 올해 29회째를 맞았다. 지난 12일 경기도 고양 삼성화재 글로벌캠퍼스에서 출사표를 던진 32명의 기사들은 숨 가쁜 일정 속에서 명승부를 쏟아냈다. 올해 세계 메이저 바둑대회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삼성화재배였다.
◆‘최강자’ vs ‘인해전술’
한국 바둑계의 모든 눈은 신진서 9단을 향해 있었다. 신 9단이 2020년 1월부터 이어온 한국랭킹 1위 행진은 이번 달로 59개월을 채웠다. 다음 달 60개월로 역대 최장 1위 기록을 세우는 역사적인 독주로 일찌감치 국내를 평정했다.
끝이 아니다. 올해 LG배와 란커배 제패로 메이저 통산 7회 우승을 일구며 세계 최강자로 군림했다. 2022년 삼성화재배 마수걸이 우승에 이은 대회 2번째 우승 그리고 올해 메이저 3관왕 타이틀까지 노려본 배경이다.
중국의 ‘인해전술’ 대처가 핵심이었다. 2연패를 노리는 딩하오 9단, 절정의 기량을 뽐내는 리쉬안하오 9단, 2004년생 신예 진위청 8단 등 중국 기사만 16명이 포진했기 때문. 반드시 넘어야 할 ‘만리장성’이었다.
◆악전고투
신 9단은 본선 시작과 함께 왕싱하오 9단을 꺾고, 16강에서 기적 같은 역전극으로 커제 9단까지 잡아냈다.
외로운 싸움은 한계가 있었다. 한국랭킹 2위 박정환 9단, 3위 변상일 9단 등 신 9단을 제외한 한국 기사 전원이 조기탈락해버린 것. 결국 신 9단은 유일한 8강 생존자의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딩하오 9단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체력이 발목을 잡았다. 대회 직전 중국 청두에서 열린 난양배에서 5일간 무려 4번의 대국을 펼쳤다. 개막 닷새 전인 7일에서야 귀국했다. 심지어 삼성화재배는 타 대회와 달리 매일 대국이 펼쳐지는 ‘속도의 기전’. 최강자의 집중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한국 바둑도 홈에서 쓸쓸하게 퇴장했다.
◆2연패
신진서가 빠진 자리, 트로피는 딩하오 9단의 몫이었다. 32강부터 강동윤 9단, 최정 9단, 신진서 9단 등 한국 강자들을 물리쳤고, 4강에서 진위청 8단까지 제압하며 기세를 올렸다.
당이페이 9단을 마주한 대망의 결승에서 1국을 내주며 수세에 몰렸지만, 남다른 뒷심으로 2·3국을 따내는 역전극을 빚었다. 이창호 9단(3연패·2∼4회), 조훈현 9단(6∼7회), 이세돌 9단(12∼13회), 커제 9단(20∼21회)에 이은 대회 5번째 2연패 금자탑으로 우승 상금 3억원을 안았다.
그는 “처음에는 결과에 대해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는데 신진서 선수를 이기고 나니 갑자기 목표가 생겼다. 최강자를 이겨 우승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고 대회를 돌아봤다.
◆희망의 불빛
한국 바둑에는 더없이 아쉬운 대회였지만, 밝은 미래도 함께 확인했다. 한국 여자 기사 랭킹 1,2위 최정 9단과 김은지 9단은 나란히 32강을 통과했다. 메이저 대회 최초 여기사 2인 동반 16강 진출 이정표였다. 최 9단은 여기사 최초 800승 업적도 더했다.
지난 대회에 이어 2년 연속 삼성화재배 본선에 닿은 안정기 8단은 세계대회 첫 16강 진출에 성공하며 개인적으로 뜻깊은 터닝포인트를 마련하기도 했다.
대회 최다 14회 우승국에 빛나는 한국이 중국(13회)에 맹추격을 허용한 대회, 실패를 뒤로 하고 명예회복을 다짐한다.
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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