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감독관으로 4년 “왜 넓고 깊게 보지 못했을까 반성”
-“양상문 코치님 대단해… 세상에 정해진 것은 없다”
무릎 부상으로 어린 시절 일찍 접어야 했던 야구 선수의 꿈. 생계유지를 위해 트럭 운전과 전화선 가설 작업 일을 하던 중 가슴을 때리는 간절한 한마디가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야구가 하고 싶다.” 무작정 야구장으로 향했다. “배팅볼 투수라도 하겠다”고 외쳤다. 간절한 마음이 통했을까. 어렵사리 기회를 잡았다. 허투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작은 희망의 볼을 쏘아 올렸다.
야수 출신이지만 공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공 하나에 절실함을 담았다. 조금이라도 타자들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더 잘 던지겠다는 일념 하나로 볼을 뿌렸다. 이 와중에 자신의 투구폼도 만들어갔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하다고 했던가. 이 투수는 훗날 프로야구 무대를 누비며 17시즌 동안 통산 120승, 2080이닝(역대 5위), 평균자책점 3.54의 기록을 남긴 대투수로 프로야구 역사를 새겼다. ‘야수 출신, 배팅볼 투수 출신’으로 60완투, 16완봉이라는 숫자를 일궈낸, ‘불굴의 의지’라는 수식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야구인, 바로 한용덕 KBO 경기위원이다. 야구인들은 그를 두고 “화려하진 않았지만, 절대 쉽게 무너지지 않는 투수”라고 평가했다.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가 그를 직접 만났다.
◆”인간 한용덕을 채운 4년”
한 위원은 4년째 KBO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수로, 지도자로 쉼 없이 달려왔던 한 위원은 처음으로 그라운드에서 한 발 물러나 지켜보고 있다. 한 위원은 “선수 생활까지 합하면 40년을 야구에 미쳐 살았다. 사실 야구장을 떠나면서 ‘야구장 근처도 가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정이 뚝 떨어졌다”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오래가지 않더라. 어느새 야구가 다시 그리워지더라”고 껄껄 웃었다.
그러던 찰나 KBO에서 연락을 받았다. 경기감독관 자리를 제안했다. 한 위원은 “처음 제안을 받고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다시 야구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더라. KBO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전했다.
올 시즌까지 4년째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 위원은 4년을 돌아보며 “인간 한용덕을 채운 시간”이라고 정리했다. 한 위원은 “처음으로 현장에서 한발 물러나 야구를 보니 마음은 편하더라. 그때부터 야구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며 ”감독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내가 왜 그리 얽매어 있었을까. 왜 앞만 보고 달려갔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털어놨다. 이어 “젊은 선수들을 보면서도 ‘이렇게 지도했다면 더 많이 성장했을 텐데’는 생각도 했다”며 “야구를 더 넓고 깊게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야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자체가 행복한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4년 만에 이뤄진 재평가
야구판에서는 한 위원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사령탑 시절 성적 부진의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가을야구’라는 최고 성적이자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한화 지휘봉을 잡은 첫 해였던 2018시즌 3위로 이끌었다. 이는 올 시즌 포함 최근 ‘27년 동안’ 최고 성적이자 유일한 가을야구의 추억이다. 한화는 2007년 3위에 오른 이후 최하위 3회, 9위 4회, 올 시즌 포함 8위 5회를 기록할 정도로 부진했다. 단일 구단 역대 최장 기간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불명예 신기록을 막은 것도 ‘한용덕 감독’ 시절이다. 한 위원은 “재평가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최근 들어 찾아와 인사하고 사인을 요청하거나 사진을 찍어 달라는 팬들이 많아졌다. 아직도 알아봐 주시니까 그저 감사하다”고 전했다.
한 위원은 많은 유망주를 키워 내기도 했다. 당장 성적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보며 ‘뎁스 강화’을 내세웠다. 이에 신인 드래프트에서 2019년 야수를, 2020년에는 투수를 중심으로 선발했다. 당시만 해도 ‘성적이 먼저지 뎁스를 논할 때냐’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굳건히 팀의 미래를 바라봤다.
덕분에 현재 한화엔 없어서는 안 될 타자로 성장한 노시환을 품었다. 여기에 임종찬, 유로결, 강재민, 남지민 등 세대교체의 핵심으로 떠오른 선수들이다. 정은원 역시 한 위원 체제에서 중용됐다. 특히 마무리 투수 주현상의 경우 한 위원이 감독 시절 결단을 내리면서 내야수에서 투수로 전향했다. 현재 한화를 떠났지만 변우혁(KIA) 장진혁, 한승주(이상 KT) 등도 한 위원이 선발하거나 기회를 준 선수들이다. 한 위원은 “성적과 미래를 동시에 보기는 너무 어려운 것 같다. 모든 지도자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라며 “그래도 선발했던 선수들이 잘해주니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미소 지었다.
◆육아하는 할아버지
선수, 지도자 시절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한 위원은 “감독을 그만두고 난 뒤에 아내가 ‘이제 그동안 못한 거 하고 살아보자’고 말하더라. 사실 감독 자리를 떠나고 집 밖으로 나가기도 겁날 정도로 힘들었는데, 아내의 한마디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며 “너무 야구에만 몰입해 살면서 가족을 살피지 못했다는 생각을 그제야 했다. 돌이켜 보니 우리 아들을 마음껏 안아준 적이 없더라. 예전에는 선배들이 투수는 손이 생명이라며 목욕탕에 들어갈 때 투구하는 손은 들고 들을 정도니까”라고 말끝을 흐렸다.
한 감독은 가족과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리스트로 적어 하나씩 행동에 옮겼다. 아내와의 여행, 아내와 함께 자전거 타기, 집안일, 손녀딸 육아까지 다양했다. 한 위원은 “평생 안 하던 집안일을 하는데 진짜 힘들더라. 속으로 그냥 운동장 100바퀴 뛰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활짝 웃으며 “이 힘든 일을 아내에게만 맡겼으니 정말 많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전했다.
손녀딸 육아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한 위원은 “솔직히 우리 아들도 못 챙겨줬는데, 할 줄 아는 게 있겠나. 많이 안아주고, 열심히 놀아줬다. 아들에게 못해준 것까지 다하려고 노력했다”며 “감독 시절에 아내는 물론 아들, 며느리까지 얼마나 내 눈치를 봤겠나. 하나씩 갚아가겠다는 생각이다. 이제라도 그동안 누리지 못한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전했다.
최근에는 소녀딸과의 영상 통화가 하루의 낙이다. 한 위원은 “아들이 직장을 다니다가 못 다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서 네덜란드로 떠났다. 그래서 거의 매일 손녀딸과 영상 통화를 한다”며 “영상통화를 시작하면 1시간30분씩 한다. 이제는 말도 조곤조곤 아주 잘한다.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미소 지었다.
◆”살아 숨 쉬는 느낌과 일상의 행복 사이”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현장 복귀에 대한 생각이다. 이 질문에 한참을 고민했다. 이윽고 입을 땐 한 위원은 “현장에서 서로 부딪혀가며 호흡하는 그런 살아 숨 쉬는 느낌에 대한 그리움이 큰 것은 사실이다. 발걸음 물러나 야구를 바라보면서 공부도 많이 했고, 느낀 바도 크다. 현장에 돌아가면 이전과는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걱정은 그동안 누려온 일상의 행복이다. 한 위원은 “아내와 자전거를 함께 타는데 성격이 급해서 앞으로 먼저 달려가고 그랬다. 그러다가 아내가 함께 가자고 한마디 하더라(웃음)”며 “그러면서 ‘아 내가 그동안 배려를 받고 살았지, 배려를 하고 살아오지 않았구나’라는 것을 깨았다. 지금은 밸런스도 맞추며 기다리기도 하고, 뒤에서 따라가기도 한다. 기다림과 배려를 이 나이에 새롭게 배우고 있다. 현장으로 다시 나간다면 ‘이런 소중한 시간을 또 누릴 수 없겠구나’는 생각에 아쉬움도 크다”고 전했다.
대화를 이어가던 중 한 위원은 양상문 한화 투수 코치를 언급했다. 양 코치는 지난 7월 프로야구 한화가 김경문 감독을 영입한 뒤 후속 코치진 개편에 따라 투수 코치로 합류한 바 있다. 한 위원은 “양 코치님께서 투수 코치 역할을 맡게 될지는 상상도 못 했다. 나 역시 감독 자리를 떠나면서 ‘현장에서 내 야구 인생은 이제 끝났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보다 더 훌륭한 경력을 가진 양 코치님께서 결단을 내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 꼭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구나. 토대만 만들어진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구나’는 점을 깨닫았다”고 전했다.
한 위원은 “미래가 어찌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 야구를 너무 사랑하고,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눈빛을 번뜩였다.
권영준 기자 young0708@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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