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5년의 일이다. 30대 후반의 여인이 부친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걱정이라며 고민을 털어놨다. 그녀는 무남독녀 외동딸로서 깊은 수심에 잠겨있는데 어디선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놀라 두리번거렸지만 거기엔 나와 그녀 단 둘뿐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그녀의 부친.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부친의 생령이 그녀와 함께 온 것이었다. “나는 한 달 후에 떠납니다. 하지만 내 딸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딸에게 알려 주십시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아버님 병명을 아십니까?” 그러자 여인은 “늑막염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날 병이 ‘늑막염’일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병원에서 오진을 했던 것 같다. “잘 들으십시오. 아버님의 병은 늑막염이 아닙니다. 약 한 달 뒤에 부친이 떠나실 것 같으니 그동안 감정을 잘 정리하시고 특히 법적인 상속문제를 잘 마무리 짓길 바랍니다.” 여인은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병원에서 큰 병이 아니라고 했다면서 반신반의했지만 내 말을 듣고 부친과 남은 시간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는 한 달 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부친은 떠났다. 장례를 끝낸 뒤 여인은 만약 그때 내가 언제 떠나신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제야 나는 부친 영가의 목소리를 들었던 사실을 말해줬다. 물론 믿기 힘든 일이었다.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의 명이 다할 무렵에는 혼이 약간 뜹니다. 이때 평상시 모습과는 다른 행동을 하곤 합니다. 바로 혼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찾아왔을 때 이미 부친 영가도 함께 오셨습니다.” 이에 여인은 무척 놀라워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부친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 영혼이 되어 찾아왔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그녀는 “우리 아버지 떠나시는 날도 아셨으니 내가 떠날 때도 꼭 미리 알려 달라”며 농담을 해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육체는 생령의 음직임을 알지 못한다. 물론 영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은 미리 할 수 있지만 이런 일은 흔하지 않다. 생령도 영혼이기에 인간이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을 예견한다. 간혹 시한부 환자가 “언제쯤 죽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그 때쯤 숨을 거두는 일이 있는데 모두 생령의 예지력 때문. 장모님도 돌아가시기 전 영가로 자주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2003년 11월 미국에 있었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수 십 년 동안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장모님이 영가로 나타나서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씀을 하고 돌아서기를 여러 번. 불안한 마음에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려줬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반신반의했다. 돌아가시기 전 날, 장모님은 평소보다 식사도 잘 하셨고 또렷한 눈빛으로 가족들을 찬찬히 훑어보시고는 아주 잠깐 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어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사람의 운명을 미리 안다는 것은 마음의 준비와 정리할 시간이 있어 좋을 것 같지만 그래도 슬픈 마음은 어찌 할 수가 없다. 특히 가족일 때는 더욱 그렇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꿈을 꾼다고 생각하세요”라고 하며 손을 잡아주는 것이 고작일 때가 많다. 장모님께서 머나먼 여행을 떠나던 날, 나는 장인어른 영가를 뵐 수 있었다. 그동안 잘 해줘서 고맙다며 이제는 당신이 데려간다는 장인어른 말씀에 고개 숙인 채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했다. 미리 아는 만큼 슬픔도 그 시간만큼 더 한 것 아니겠는가. (hooam.com/ whoiamtv.kr)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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