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성이 택한 고행길, 도전자의 숙명이기도 하다.
포스팅(비공개 경쟁입찰) 시스템을 통해 미국 메이저리그(MLB)로 향한 9번째 한국 선수가 탄생했다. 국가대표 내야수 김혜성이 지난 4일 LA 다저스와 3+2년 최대 2200만달러(약 324억원)에 계약을 맺으며 꿈에 그리던 미국 무대 진출에 성공했다.
포스팅 마감 기한을 꽉 채운 극적인 합의였다. 게다가 행선지가 MLB 30개 구단 중 국내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다저스다. 과거 박찬호, 류현진 등 한국 대표 빅리거들이 몸담았던 구단이자, 지금은 오타니 쇼헤이라는 야구계 최대 거물이 소속된 팀이다. 지난해 월드시리즈(WS) 우승까지 맛본 다저스는 실력과 화제성 모두 ‘월드 클래스’를 자랑하는 자타공인 명문 구단이다.
김혜성의 도전을 두고는 시선이 엇갈린다. 바늘구멍 같은 생존 경쟁이 예고된 ‘초호화 군단’ 다저스를 굳이 택해야 했는지가 핵심이다. 김혜성에게 관심을 드러낸 팀 중, 로스터 뎁스가 얕은 LA 에인절스가 더 맞는 옷이었다는 의견도 나온다. 심지어 에인절스가 제안했다고 알려진 5년 2800만달러 계약이 기간과 총액 모든 면에서 낫기도 했다.
스스로 고난의 행군을 택한 것이다. 게다가 그에겐 ‘마이너리그 거부권’도 없다. 과거 류현진이 포스팅 마감 직전까지 다저스와 줄다리기하며 얻어냈던 권리로, 말 그대로 구단의 마이너리그행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선수 친화 옵션이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뛰었던 김현수도 이 권리로 자신의 자리를 붙잡은 바 있다.
옵션을 챙기지 못한 김혜성이 언제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다. 고우석의 전례를 우려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마이너 거부권이 없던 고우석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개막 엔트리 진입에 실패하고 1년 내내 마이너를 전전했다.
다만, 마이너 거부권이 만사형통이 아니라는 점이 김혜성의 비빌 언덕이다. 팀 입장에서 ‘강등시킬 수 없는 선수’는 로스터 유동성을 막는 장애물이다. 웬만한 실력이 아니면 쉽게 콜업하기 힘들어진다는 뜻. 증명되지 않은 선수에게는 오히려 운신의 폭을 좁힐 수 있는 양날의 검인 셈이다. 고우석이 2년 차부터 거부권을 가지게 되지만, 올 시즌 전망이 더 어두운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볼티모어로 향했던 윤석민도 이 옵션이 발동된 2년 차에 결국 팀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김혜성이 다가올 스프링캠프에서 어느 정도 가치를 보여준 후, 다저스 입장에서 편하게 ‘긁어볼 수 있는 선수’가 되는 게 낫다는 의미다. 상대적으로 적은 기대치 속에서 증명에 성공한다면, 실력으로 사실상의 마이너 거부권을 따내는 시나리오를 충분히 그릴 수 있다.
거부권에 대한 아쉬움은 넣어두고, 현실적인 경쟁을 고민할 때다. 김혜성이 최근 몇 년간 소화해온 주 포지션은 2루수다. 다저스의 올 시즌 주전 2루수로 시작할 개빈 럭스가 경쟁 상대로 언급되는 이유다. 하지만 럭스의 이름값이 오타니, 무키 베츠, 프레디 프리먼 등의 괴물들에 비해 입지가 약하다고 해서, 냉정하게 김혜성이 당장 뚫어낼 정도는 아니다.
크리스 테일러라는 베테랑이 맡고 있는 전천후 유틸리티 포지션이 바라볼 만한 목표로 언급된다. 이외에도 포지션은 외야지만 앤디 파헤스, 제임스 아웃맨 등 다저스 마지막 야수 엔트리 자리에 도전하는 자원들도 직접적인 경쟁 상대다. 이들이 버틴다면, 다저스 입장에서는 김혜성 대신 내·외야 모두 수준급으로 소화하는 토미 에드먼을 내야로 돌리는 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김혜성이 자신의 장점인 젊은 나이와 주력, 수비 등을 활용해 하나씩 물음표를 걷어내 가야 한다. 경기 후반 수비 강화를 위한 대수비, 1점을 위한 대주자 등의 작은 역할이 언제 기폭제가 될지 모르는 법이다. 절벽에서 피는 꽃이 더 화려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할 김혜성이다.
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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