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바둑기사가 한국의 뒷문을 지킨다.
한국 바둑 최고의 스타, 신진서 9단의 별명은 ‘신공지능(신진서+인공지능)’이다. 2016년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대결을 벌인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의 시대가 도래한 후, AI와 가장 유사하게 대국을 펼치는 그의 모습에서 비롯된 타이틀이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 기계의 경지에 도달한 신진서의 위엄이 담겼다. 그 정교한 ‘신공지능’이 최고의 국가대항전, 제2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다시 가동을 준비한다.
◆낭중지추
바둑인 부모 밑에서 자란 신진서는 5살에 아버지가 운영하는 바둑교실에서 바둑과 마주했다. 재능은 숨길 수 없었다. 인터넷 독학만으로 바둑을 깨달은 그는 2012년 제1회 영재입단대회에서 한국기원 연구생 상대 12전 전승 기염을 토했다. 최연소 입단 5위(12세3개월30일) 기록이 더해지며 프로기사로 거듭났다.
‘바둑 괴물’의 걸음은 묵직했다. 2014년 바둑대상 신예기사상으로 출발해 2018년 역대 최연소(18세8개월) 랭킹 1위에 등극했다. 그해 다승·승률·연승 부문 3관왕으로 생애 첫 최우수기사상도 품었다. 이후 2020년 1월부터 이달까지 57개월 동안 랭킹 1위 장기집권 중인 신진서는 박정환 9단의 최장 59개월 연속 1위 기록을 넘보는 중이다.
업적은 줄을 잇는다. 올해 3월 통산 1000대국, 5월 800승 등을 신고한 그의 현재 성적표는 1035전 817승 216패다. 한국 프로통산 최고 승률 79.1%를 마크 중이다. 지난해에는 한국 바둑 최초 연간 100승 돌파도 이뤄냈다. 꿈의 통산 승률 80%도 신진서라면 가능하다는 평가다. 그가 세계 최고의 바둑 선수라는 점에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한국 바둑 대표팀의 홍민표 감독은 신진서에 대해 “장점이 수도 없이 많은 선수다. 그중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끊임없이 기력 향상을 추구한다는 점”이라고 엄지를 세운다. 이어 “세계 일인자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도전하는 원동력을 가졌다. 앞으로도 계속 정진하는 기사가 될 것”이라고 뿌듯함을 숨기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품고
명성에 걸맞게 트로피 수집에도 부족함이 없다. 지난해 8월 제9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우승, 지난달 란커배 세계바둑오픈 우승 등 메이저 대회만 통산 7번을 제패했다. 이 외에도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 GS칼텍스배와 쏘팔코사놀 최고기사결정전 5연패 등 숱한 영예들을 쓸어 담아왔다.
그런 그에게도 더 특별한 대회가 있다. 바로 농심신라면배다. ‘한·중·일 바둑 삼국지’로 불리는 이 대회는 개인 대회가 주를 이루는 바둑계에서 찾기 힘든 국가대항전이다. 각 팀 5명의 선수들이 연승전 방식으로 우승을 다툰다. 한국 대표라는 수식어가 선수들의 가슴을 울릴 수밖에 없다.
그는 “평소라면 개인전 세계대회가 우선이겠지만, 여기는 다르다. 개인전 못지않게 중요도가 큰 대회”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어 “가장 규모가 큰 단체전이고 팬들의 관심도 대단하다. 개인적으로 정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설현준, 김명훈, 신민준, 박정환 9단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 평소와 다른 풍경도 펼쳐진다. 동료가 출전하는 경기마다 홍민표 감독을 필두로 모두 검토실에 모여들어 열띤 토론과 함께 깊이 있는 반상(盤上) 연구에 매진한다.
신진서의 마음에도 ‘원팀‘이 새겨진다. 그는 “개인전에서도 이런 대화를 안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언젠가 서로 맞붙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가 한 팀”이라며 “견제가 전혀 없기 때문에 훨씬 편하게 생각을 공유하고 전략을 짤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색다른 경험”이라며 미소를 띠었다.
◆5연패를 향해
덕분에 한국은 옌지에서 열린 1차 대회에서 2승1패의 성적을 남기며 산뜻하게 출발했다. 이대로 대회 5연패 및 17번째 우승을 노린다. “5연패를 달성하면 (메이저급) 세계대회 우승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는 신진서의 각오는 남다르다.
그에게는 좋은 추억만 가득한 곳이다. 6번 출전해 5번의 우승, 1번의 준우승을 함께 했다. 통산 16승2패, 승률 88.9%의 존재감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22회 대회(2020∼2021년) 5연승을 시작으로 총 4개 대회에서 역대 최장 16연승을 내달리는 중이다. 특히 직전 대회에서 동료 4인이 모두 탈락한 가운데 홀로 6명의 적을 연달아 꺾으며 트로피를 챙긴 장면은 그야말로 백미였다.
“이루기 힘든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당시를 회상한 그는 이번 대회에서 다시 새 역사를 노린다. 이창호 9단의 한국 선수 최다 19승에 도전한다. 현재 승률 88.89%(16승2패)를 끌어올려 꿈의 90% 승률도 바라본다. 때에 따라서는 판팅위(중국)가 보유한 대회 최다 21승까지 넘어설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성적도 바랄 게 없지만, 지고 싶은 선수는 없다”며 “적어도 이번 대회에서 (연승이) 끊기고 싶지는 않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내 한계를 뚫고 이어가 보겠다”는 당찬 출사표를 덧붙였다.
◆백두산의 정기로
농심신라면배는 약 6개월 동안 3회로 나뉘어 진행된다. 옌지 1차 대회를 넘어 11월 부산 2차 대회, 내년 2월 중국 상하이 3차 대회로 우승국을 가린다. 마침 다음 향할 부산은 그가 나고 자란 곳이다.
신진서는 “고향에서 열리기에 당연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 주자가 될 확률이 높아 출전은 상하이까지 밀릴 수 있다”며 “한국이 지난번에는 부산에서 참패를 당했지만, 이번에는 옌지에서 분위기가 좋았다. 부담을 내려놓는다면 팀원들이 좋은 결과를 내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이곳 옌지에서 특별한 기운도 받아 간다. 한국 선수의 대국이 없는 날, 시간을 내 백두산 천지를 방문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해발 2267m의 화창한 날씨가 대표팀을 반기면서, 웅장한 천지를 한눈에 담았다.
신진서는 “농심과 한국기원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 덕분에 운도 많이 따르는 것 같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책임감을 안고 반드시 우승 트로피를 가져오겠다”고 힘줘 말했다.
옌지=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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