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배구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1990년대. 황금세대의 일원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김세진(50)은 당대 최고의 왼손잡이 아포짓 스파이커였다. 훤칠한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스파이크는 팬들을 코트로 불러모았다. 그랬던 그도 어느덧 만 50세, 본격적인 인생 후반전에 임한다. 그것도 익숙했던 코트 위가 아닌 한국배구연맹(KOVO)의 책상 앞에서, 경기운영본부장이라는 생경한 타이틀을 달고 새로운 도전을 펼치는 중이다.
◆월드 스타
1991년 겨울, 옥천공고 2학년 김세진이 최연소 태극마크를 짊어졌다. 내로라하는 선배들 사이에서 주눅들지 않고 재능을 뽐냈다. 1994년 국제배구연맹(FIVB) 월드리그에서 공격성공률 1위로 공격상을 수상해 세간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한양대 시절을 거쳐 삼성화재 왕조의 공신으로 코트를 폭격할 때도, 언제나 ‘월드스타’ 수식어가 따라다닌 배경이다.
오랜만에 듣는 별명에 멋쩍은 미소를 짓는 김 본부장에게 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다. 그러자 “벌써 30년이 됐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준결승 한일전 패배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메달 불발 순간이 떠오른다”며 “아시안게임은 멤버 구성이 정말 좋아서 기대감이 컸는데, 일본에 셧아웃 패배를 당해 동메달에 그쳤다. 올림픽도 조별리그에서 유독 많았던 풀세트 접전에서 패해 아쉬움이 컸다”고 털어놨다.
숱한 환희의 순간 대신 좌절과 실패를 되새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스포츠는 승리와 패배가 극명하게 갈린다. 졌을 때 허망함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며 “패배보다 승리가 익숙한 이미지가 있겠지만, 사실 난 지는 경기가 더 많은 선수였다. 시골에서 자라 각광 받는 선수도 아니었다. 실패 속에서 정말 많이 배웠고, 독해졌다. 그 마음가짐이 날 좋은 선수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고 미소 지었다.
굵직한 발자국을 남겨왔지만, 스스로를 “운이 좋은 선수”라고 애써 낮춘다. 그는 “인생이라는 게, 누구를 만나 어떤 걸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정말 좋은 선생님들과 동료들을 만났다. 정말 큰 행운이었던 셈”이라고 웃었다.
“키 작던 어린 시절에 배구를 포기하려 했던 저를 잡아주신 조정구 감독님(수유초), 이재관 감독님(옥천공고) 그리고 한양대로 스카우트 해주신 송만덕 감독님과 삼성화재 시절 신치용 감독님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또 신진식, 김상우, 최태웅, 여오현 등 너무 훌륭한 친구들을 둬서 김세진이라는 선수가 있지 않았나 싶다”는 애틋한 감사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우승 감독
2005~2006시즌 현역 은퇴를 알린 그는 수려한 말솜씨를 앞세워 배구 해설가로 현장을 누볐다. 마이크를 타고 전달되는 해박한 배구 지식과 경기를 바라보는 분석력을 눈여겨 본 2013년의 신생팀 OK저축은행(현 OK금융그룹)이 그를 초대 사령탑에 앉히면서 ‘지도자’ 김세진의 삶이 시작됐다.
2번째 시즌부터 2연속 챔피언결정전 우승(2014∼2016시즌)을 빚는 기염을 토했다. 코치 경험도 없었던 ‘초짜 사령탑’이 일순 ‘우승 감독’으로 떠올랐다. 그는 “처음에는 고사했던 자리다. 당시 OK가 ‘팀다운 팀’을 만들고 싶다며 절 강력하게 원하셔서 ‘한 번 해보겠습니다’라면서 수락했던 기억이 떠오른다”며 출발점을 되짚었다.
이어 “미친 배구를 하고 싶었다. 배구에 미친 선수들이 코트 안에서 뛰노는 모습을 그렸다. 스타 출신 감독들의 ‘이걸 왜 못하느냐’ 식의 맹점을 꼭 피하고 싶었다. 선수들과 엇박자 없이 하나로 뭉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자신의 지도 철학을 소개했다. “아직도 새벽 2시면 제자들한테 보고 싶다고 연락이 온다. 그런 친구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참 행운이다. 덕분에 감독 생활 잘했다고 느낀다”는 그의 미소에서 ‘감독‘ 김세진의 매력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다는 큰 포부가 있었다. 완벽한 성공까진 아니더라도 우승을 했으니 제 색깔은 드러내지 않았나 싶다”고 겸연쩍게 웃은 그는 “프런트와 소통이라든가, 창단 팀 신임 감독으로서 서툴렀던 부분들이 많이 아쉽긴 하다. 그래도 돌아보면 ‘참 재미있게 배구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추억에 젖어 들었다.
◆가지 않았던 길로
빛나지 않은 순간이 없었던 커리어, 하지만 안주할 틈은 없다. KOVO 행정가로 새로운 도전에 나선 이유다. 지난해 6월 경기운영본부장에 선임돼 배구계 발전을 위해 숨 가쁜 매일을 보내는 중이다.
김 본부장은 “워낙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다. 모르는 분야지만 다시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발을 들였다”며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사람들을 대하는 게 정말 어렵더라. 그래도 부족한 점을 채우고 맞춰가는 재미가 있다. 지금도 일하는 게 즐겁다”며 웃었다.
경기 제반 사항 관리, 심판진 운영이 핵심 업무다. 그는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 이 일을 맡았다고 들었다. 그 덕에 심판진과 구단 사이 의견 충돌을 조율하는 가교 역할은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 다행히 전체적인 분위기나 관련 업무들이 조금씩 선순환을 향해 가고 있다.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다른 사명감이 함께 한다. 그는 “스타 출신으로 연맹에서 행정을 하는 사례 자체가 드물다. 그 점에서 내 나름의 색깔을 한번 제시하고 싶었다. 한국 배구가 봉착한 과도기를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도록 든든한 후방 지원에 나섰던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한다”고 힘줘 말했다.
◆찬란한 내일
가야할 길은 멀다. “한국 배구 발전을 위해 여러 현안을 신경 쓰고 있다”는 그는 “국제 추세에 맞게 비디오판독 룰을 변경하고 AI와 같은 새로운 판독 기술들을 도입하려 한다. 화제가 되는 2군 리그 운영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파악해 실질적으로 프로배구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성공적인 첫 1년 임기를 채운 그는 KOVO 이사회의 심의를 거친 끝에 본부장 연임도 확정됐다. 연맹은 지난 시즌 안정적으로 운영본부를 이끌고 현장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가져간 김 본부장의 뛰어난 역량에 합격도장을 쾅 찍었다.
김 본부장은 “저야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나를 찾아주셨으니, 역량을 발휘하는 데만 집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한 번쯤은 감독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있다. 다만 시대 흐름이 워낙 빠르게 바뀌지 않나. 현장을 떠난 지 벌써 5년이다. 배구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항상 담아두려 노력하는 중이다. 그게 또 본부장 일이기도 하지 않나”라며 밝게 웃었다.
이어 “인생을 풀세트 접전으로 보면, 이제 3세트 정도 넘어가지 않나 싶다. 돌아보면 선수로도 창단 팀에 들어갔고, 지도자로도 초대 감독을 맡는 등 항상 시작점에 서왔다. 앞으로도 새로움에 도전하는 사람, 패러다임을 선도하는 배구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밝은 미래를 향한 행복한 상상에 잠긴 그는 진솔하면서도 소박한 목표를 덧붙인 인사로 작별을 전했다.
“인생 5세트까지 간다면, 그때는 어린 배구 꿈나무 친구들과 살 부대끼며 체육관에서 뒹굴고 놀고 있지 않을까요. 나이를 앞으로 더 먹더라도 항상 누군가가 찾아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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