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과거 어떤 왕들보다 말을 사랑하는 왕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마주로 꽤 유명했다. 4살때 ‘페기’라는 이름의 조랑말을 선물 받은 것을 계기로 말 타기를 평생의 취미로 삼았다. 어릴적부터 느낀 말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그를 마주로, 말생산자로, 이어지게 해줬다. 경마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그는 젊은 시절 아마추어 기수로 활동했으며 종종 공식 행사에 말을 타고 참석했다. 1953년 대관식 이후 왕실이 주최하는 경마 대회인 로열 애스콧에 매년 참석하기도 했다.
마주들 중에는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적지 않다. ‘샤넬’의 오너인 베르트하이머 가문이 대표적이다. 베르트하이머 형제들은 매년 프랑스 최고 마주·생산자 랭킹 5위 안에 들 정도로 경주마 생산과 마주 활동에 많은 돈을 투자하며 정성을 들였다. 역대 최고의 암말로 평가받고 있는 ‘골디코바’도 베르트하이머 가문 소속이다.
이런 애정 덕분인지, 유럽에선 축구 다음으로 경마가 인기 높은 레저스포츠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경우, 경마 시행 규모나 마권 매출액이 미국과 호주 등에 뒤지지만 경마 종주국의 위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경마가 열리는 날이면 가족이나 친구끼리 축구장에 가듯이 경마장을 찾아 축제 분위기를 즐긴다. 영국은 경마 개최를 통해 천문학적인 관광 수입을 거두고 있다. 영국에서 ‘축구는 멈춰도 경마는 멈출 수 없다’는 자부심이 여기서 비롯됐다.
호주도 ‘멜버른컵’이 열리는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등 경마를 축제화하고 있다. 1861년 출범한 멜버른컵은 세계 3대 경마대회 중 하나로 꼽힌다. 멜버른컵이 열리는 매년 11월 첫번째 화요일은 휴일로 지정되는 국가적인 행사다.
우리나라 상황은 어떨까. 아직도 경마를 사행산업으로 생각하는 편견이 적지 않다. 하지만 최근에는 경마를 보는 사회적 시선이 점점 바뀌고 있다. 경마가 단순히 베팅만 하는 게임이 아니라 경주마 생산부터 유통, 경마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파급력을 지닌 산업이기 때문이다. 여느 축산업보다 고부가가치 산업이며 어떤 서비스업 못지않게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특히 국내 경마계는 올해 새로운 변화를 앞두고 있다. 한국마사회의 숙원사업이었던 ‘온라인 마권 발매’가 6월 21일부터 정식운영되기 때문이다. 온라인 마권 발매는 경마장이나 장외발매소에 방문하지 않고, 본인 명의의 모바일 기기를 이용해서 마권을 구매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미 로또와 스포츠토토, 경륜·경정 등에서는 온라인 발매가 운영 중이다. 온라인 마권은 미성년자 접근, 경마 과몰입 등의 부작용 방지를 위해 구매가 가능한 연령을 21세 이상으로 제한했다. 구매 상한액은 경주당 10만원인 오프라인에 비해 5만원으로 축소됐다.
온라인 마권 발매가 본격 시행되면, 경마 산업 전반의 패러다임이 크게 바뀔 것으로 보인다. 한국경마는 코로나19 유행 당시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경마 전면 중단, 무관중 경기 등을 거치면서 매출까지 하락했다.
난국을 풀기 위한 해법 중 하나로 ‘온라인 마권 발매’ 카드를 다시 꺼내들게 된 것이다. 온라인 마권 발매 제도는 국내에서도 한때 도입했지만, 2009년 7월 20일 폐지됐다. 그만큼 기대감이 크다.
현재 미국, 호주, 프랑스, 일본 등 말산업 강대국들은 온라인 마권 발매를 기반으로 무관중 경마 혹은 일부 유관중 경마를 시행하며 말산업을 유지·보호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코로나19 위기를 기회로 발판삼아 말산업 대국으로 우뚝 올라섰다. 코로나 기간 동안에도 무관중 경마를 지속해 경주마 생산부터 경마 시행, 경주마 투자로 이어지는 말산업 순환체계가 원활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0년 일본의 경주마 생산두수는 2019년 대비 2%, 경마매출은 3.4% 증가했다. 일본의 온라인 마권매출 점유율은 90%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경마는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그 존재감을 과시하지 못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과 업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경마의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건전한 레저스포츠가 되기 위한 방안도 절실하다. 비온 뒤에 땅은 오히려 굳어지는 법. 새로운 변화와 진기록들이 장식하게 될 2024년. 국내 경마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기대해본다.
김민지 기자 minji@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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