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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스포츠] 드라마, 그 이상의 이야기…김재환 코치 “저도 신기해요”

입력 : 2023-11-23 09:31:43 수정 : 2023-11-23 09: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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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 SK 김재환 코치 사진=김용학 기자 yhkim@sportsworldi.com

“제 가치, 증명해야죠!”

 

프로농구 김재환 SK 코치는 선수시절 ‘슈퍼맨’이라 불렸다. 큰 키에 훈훈한 외모, 지적인 이미지까지. 영화 슈퍼맨서 연기한 배우 클라크 켄트를 꼭 닮았다. 특히 덩크콘테스트에서 선보인 화끈한 퍼포먼스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변신에도 능했다. 슈퍼맨이 평소 신문기자로 일했던 것처럼, 김 코치는 은퇴 후 교사로 활약했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속편이 개봉했다. 코치로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프로농구 SK 김재환 코치 사진=김용학 기자 yhkim@sportsworldi.com

 

◆ 한 통의 전화, 달라진 인생

 

지난해 5월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전희철 SK 감독이었다. 괜히 이런저런 농담을 하던 전 감독은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코치직을 제안했다. 김 코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계약서 하나 들여다보지 않고 수락했다. 가족, 심지어 아내와도 상의하지 않은 상태였다. 말을 꺼낸 전 감독이 놀랐을 정도다. 김 코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 뒤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면서 “감독님께서 ‘바보’라고 뭐라 하시더라. ‘교사를 그만둬야 한다’고 하시더라. 그만 두죠 했다”고 전했다. 다시 SK와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적응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 코치는 “처음엔 경기 중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도 헷갈리더라”고 끄덕였다. 이른 아침부터 선수단 훈련을 봐주는 것은 기본이다. 상대 팀 전력분석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김 코치는 3개의 팀을 맡고 있다. 더욱이 전 감독은 굉장히 디테일한 스타일이다. 숫자에도 강하다. 꼼꼼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김 코치는 “전력분석원 (변)기훈이랑 같이 하는데, 둘 다 처음이다. 시간도 남들보다 많이 걸린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 팀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선수들이 정말 착하고 열심히 한다”고 덧붙였다.

 

프로농구 SK 김재환 코치 사진=김용학 기자 yhkim@sportsworldi.com

 

◆ 타고난 DNA, 놓지 않은 공부

 

스포츠는 김 코치의 숙명과도 같았다. 타고난 DNA를 가졌다. 부모님 모두 선수 출신이다. 아버지는 유도를, 어머니는 배구를 했다. 각각 키 190㎝, 174㎝ 정도다. 김 코치는 197㎝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이 하고 싶었다. 부모님 생각은 달랐다. 직접 경험했기에 얼마나 힘든 길인지 잘 알고 있을 터. 선수보다는, 즐기는 쪽을 권했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농구공을 들었다. 김 코치는 “마지막승부, 농구대잔치 등 농구 인기가 워낙 높을 때였다. 아버지가 우스갯소리로 실내에서 하는 종목이 낫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라”고 밝게 웃었다.

 

단, 학업에 대한 중요성만은 놓지 않았다. 아버지(김관현 용인대 전 교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선수를 거쳐 지도자로, 교수로 스펙트럼을 넓힌 인물이다. 김 코치는 “예전부터 아버지께서 ‘운동하는 놈은 무식하다는 소리만큼 창피한 게 없다’고 강조하셨다. 학창시절에도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수업 시간에 꼬박꼬박 필기하는 것은 물론 영어 과외도 받았다. 학습지도 풀었다. 아, 수학은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솔직히 피곤하긴 했다. 아버지께 공부하기 싫다고 떼쓰다가 많이 혼났다. 돌이켜보면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다. 자고 있으면 깨웠다”고 귀띔했다.

 

프로농구 SK 김재환 코치 사진=김용학 기자 yhkim@sportsworldi.com

 

◆ 희로애락이 함께했던 프로생활

 

2007년 신인드래프트. 김태술, 양희종, 정영삼, 박상오, 김영환, 함지훈 등 걸출한 유망주들이 대거 참여했다. ‘황금기’라 불린 배경이다. 그 자리엔 김 코치도 있었다. 1~2학년에 비해 3~4학년 보여준 모습이 약했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했다. 하나, 둘 친구들의 이름이 불리는 동안 김 코치는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다. 그때였다. 2라운드(전체 20순위)로 SK 지명을 받았다. 그것도 옆자리에 있던 신제록이 알려줘 겨우 알았다. 김 코치는 “나가면서 잠깐 뒤쪽을 봤는데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계시더라.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짧고 굵은 선수생활이었다. 프로 첫 해였던 2007~2008시즌 37경기에 나서 평균 15분 이상을 뛰었다. 경기 당 3.0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존재감을 자랑했다. 이후 상무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김 코치가 자리를 비운 2년 사이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뛸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설상가상 예기치 못한 무릎 부상까지 찾아왔다. 기회가 줄었다. D리그에서 뛰는 날이 많아졌다. 2010~2011시즌 23경기, 2011~2012시즌 24경기 출전에 그쳤다. 그렇게 3년 계약이 마무리됐다. 자유계약(FA)으로 SK에 잔류하고 싶었던 김 코치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프로농구 SK 김재환 코치 사진=김용학 기자 yhkim@sportsworldi.com

 

◆ 인생의 갈림길에서

 

결단을 내렸다. 당시 SK 지휘봉을 들고 있었던 문경은 감독은 김 코치에게 다른 팀을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갈림길에서 고민 끝에 은퇴를 택했다. 미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실을 바로보고자 했다. 김 코치는 “소속 팀에서도 인정을 못 받았는데, 다른 팀에 간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더라. 부모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고 털어놨다. 공부를 더 하고자 했다. 대학원에 진학했다. SK와의 인연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매니저직을 제안했다. 심지어 대학원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해줬다. 대학원생과 매니저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됐다.

 

유니폼은 벗고 마주한 세상은 꽤 낯설었다. 또 다른 사회였다. 김 코치는 “선수와 스태프는 완전히 다르다”고 운을 뗀 뒤 “선수 때는 진짜 운동에만 집중하면 된다. 매니저는 다르다. 해야 할 것도, 신경 써야 할 것도 많다. 나 하나 실수하면 모두가 우왕좌왕하게 된다. 꽤 날카로웠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또 한 번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졸업 시험에서 떨어진 것. 매니저 일을 그만두고 학업에 열중하기로 했다. 김 코치는 “설마 했는데 떨어졌다. 민망하더라.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하나만이라도 똑바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프로농구 SK 김재환 코치 사진=김용학 기자 yhkim@sportsworldi.com

 

◆ 교단에 서기까지

 

교수라는 새 꿈을 꿨다. 용인대학원에서 체육학 박사학위를 딴 뒤 모교인 연세대로 향했다. 우연한 기회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라고 했던가. 김 코치는 “박사를 따면 그래도 뭔가 달라질 줄 알았다. 아니더라”면서 “아버지께서 현직에 계시지 않았나. 교사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 하시더라”고 말했다. “싫다”고 버티다 결국 방향을 틀었다. 지인들에게 물어 지역 교육청 사이트에 접속했다. 공고를 낸 학교는 단 한 곳밖에 없었다. 당연하다. 2월 중순이었다. 김 코치는 “대부분 1월엔 마무리된다고 하더라”고 웃었다.

 

그곳이 비봉고등학교였다. 서류전형을 통과해 면접까지 단숨에 통과했다. 드라마 한 편을 찍었다. 비봉고는 인문계와 실업계로 나뉘어져있다. 부임하자마자 1학년 담임을 맡았다. 특성화, 그것도 교내 개성 넘치는 아이들이 한데 모여 있는 반이었다. 수업, 행정업무 등을 둘째 치고 학생들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주먹을 휘두르는 아이를 말린 기억에서부터 경찰서에 간 사연까지. 다채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걸음씩 나아갔다. 장기를 살려 농구교실을 개설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 코치는 “어느 순간 티키타가가 되더라”고 밝혔다.

 

프로농구 SK 김재환 코치 사진=김용학 기자 yhkim@sportsworldi.com

 

◆ 다시, 날아오를 시간

 

분명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풍부한 경험은 김 코치만의 특별한 무기가 됐다. 지금도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번 시즌 SK 홈 개막전엔 비봉고 농구 동아리 학생들이 현장을 찾아 뜨거운 응원을 펼치지도 했다. 김 코치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많이 물어봤다. ‘제자’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고 흐뭇해했다. 그러면서 “감독님께서 주문하신 것 하나가 선수들과 가까이 소통하는 것이었다.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다. 최대한 편하게 하려 한다. 커피 사달라고 조르는 이들도 꽤 많다”고 덧붙였다.

 

목표는 분명하다. 첫째는 팀의 우승. 그리고 두 번째는 자신의 능력치를 증명해내고자 한다. 김 코치는 “살면서 남의 눈치 많이 안 봤는데, 코치가 되고 나선 보게 되더라”면서 “누군가에게 나는 뜬금없이 농구장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친분으로 코치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보여주고 싶다. 이 자리에 있을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도 치열한 하루를 보낸다. 김 코치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얘기했던 것, 준비했던 것들이 경기에서 결과로 드러날 때 그 무엇보다 뿌듯하다”고 밝게 웃었다.

 

프로농구 SK 김재환 코치 사진=김용학 기자 yhkim@sportsworldi.com

 

이혜진 기자 hjlee@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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