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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의 인생 후반전] ‘韓 유도의 얼굴’ 전기영 용인대 교수… “저는 여전히, 국가대표입니다”

입력 : 2024-09-30 06:00:00 수정 : 2024-09-30 00:3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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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영 용인대 유도경기지도학과 교수가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스포츠월드 김용학 기자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운 것이 강하고 단단한 것을 능히 이긴다’는 유도의 기본 원리와 이념을 품은 사자성어다. 유도가 얼핏 보기에 강력한 힘이 필요해 보이는 투기(鬪技) 종목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강력한 힘의 소유자도 상대의 유연한 몸동작 한 번에 매트에 내리 꽂아질 수 있는 게 유도다.

 

1990년대 한국 유도의 아이콘, 전기영 용인대 유도경기지도학과 교수는 바로 그 부드러움의 미학을 누구보다 잘 보여줬던 주인공이다. 상징과도 같은 물 흐르는 업어치기와 불같은 승부사 기질을 섞어 올림픽 금메달, 세계선수권 3연패 등 굵직한 발자국을 찍었다. 짧았던 현역 시절이지만 누구보다 찬란하게 타올랐다. 인생 제2막의 한복판에 서있는 지금도 변함없이 자기 자리에서 묵묵하게 빛을 뿜어낸다.

 

◆유도 천재

 

소년 전기영은 정갈한 유도복의 기품에 반해 유도에 발을 들였다. 이유 있는 끌림이었다. 듬직한 체격, 기술 체득력, 타고난 유연성 등 필요한 능력치를 다 갖춘 ‘유도 천재’였다. 청석고 시절 전국대회 6관왕으로 판을 들썩일 때부터 존재감은 심상치 않았다.

 

전 교수는 “원체 내 몸이 부드러웠다. 유도가 애초에 ‘부드러울 유(柔)’ 자를 쓰지 않나. 그 덕에 각도가 없는 상황에서도 곧잘 기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며 “상대가 전혀 당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지니까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정말 쉽게 유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은 게 아닌가 싶다”고 웃었다.

 

타고난 재능에게 한국은 좁았다. 스무 살에 나선 1993년 캐나다 해밀턴 세계선수권 78㎏급에서 무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요시다 히데히코를 꺾고 트로피를 들었다. 체급을 86㎏로 올린 1995년에도 문제는 없었다. 일본 지바 세계선수권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마저 제패했다. 1997년 파리 세계선수권을 또 금빛으로 물들여 세계선수권 3연패도 쌓았다. 파죽지세, 적수가 없는 청년 전기영이었다.

 

전기영 용인대 유도경기지도학과 교수가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 인터뷰를 나누고 있다. 사진=스포츠월드 김용학 기자

 

◆BEST & WORST

 

숱한 영광의 순간, 전 교수는 그중 1995년 세계선수권 결승을 잊지 못한다. 그는 “많이들 올림픽을 최고로 꼽으시는데, 저는 조금 다르다”고 운을 떼며 “일본 지바에서 열린 그 대회에서, 나와 같이 체급을 올린 요시다를 또 만났다. 유도 종주국 일본의 위상은 대단했다. 한국이 절대 넘을 수 없는 이미지였다”고 회상에 젖었다.

 

그럼에도 모든 열세를 딛고, 일본 유도 영웅을 한판으로 넘기는 짜릿함을 맛봤다. “그때 쾌감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경기장을 막 뛰쳐나갈 뻔했다. 일본 유도 간판을 상대 안방에서 완벽하게 꺾었으니 오죽했겠나”라며 눈을 번뜩인 그는 “지금 시대에도 절대 지면 안 되는 한일전인데, 그때는 더 공기가 뜨거웠다. 애국심이 타오르는 승리였다”고 웃었다.

 

그런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결과를 바꾸고 싶은 단 한 경기를 묻자 곧장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AG) 대표 선발전을 꺼내들었다. 그는 “체급을 올리기 전이어서, 극심한 체중 감량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때 선발전에서 경기대 후배를 만났다. 상대 코치가 은사님이었는데, 정열적으로 절 이기시려는 걸 보고 순간 섭섭한 마음이 들더라”며 “감정조절을 못 하면서 경기가 말렸다. 그 순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경기를 놓아버렸다”고 회상했다. 

 

이어 “제 부족함으로 AG 연을 맺지 못한 거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봤다면, 그렇게 AG 무대를 밟았다면, 국제대회 그랜드슬램을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돌아봤다.

 

◆이른 작별

 

무서울 게 없던 최강자였지만, 그의 시대는 길지 않았다. 남들보다 빠르게 현역 생활을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박수칠 때 내려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 나이로 26살이었으니 은퇴가 참 빨랐다. 다들 그렇듯 잔부상도, 슬럼프도 있었다”는 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흔든 건 정신적 피로감이었다.

 

“돌아보면 정상에 서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즐기지 못했다. 챔피언으로서 항상 타의 모범이 돼야 한다는 강박도 참 무거웠다”며 “게다가 육체적으로도 훈련이나 체중 감량이 정말 힘들었다. 가끔 옛날 생각이 나긴 하지만 사실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크지 않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방인

 

뼛속까지 유도인인 그가 매트와 영영 멀어지는 건 불가능했다. 이번에는 몸이 아닌 머리로 유도를 받아들이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고등학교 은사님인 강형원 선생님께서 항상 후학을 양성하는 게 가장 보람찬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선수 시절에도 꾸준히 일본어, 영어를 배울 정도로 공부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그 덕에 수월하게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었다”고 바라봤다.

 

그렇게 시작한 제2의 삶, 여기에는 흥미로운 요소가 하나 숨어있다. 경기대 출신으로 박사학위를 땄던 그가 모교가 아닌 ‘한국 유도의 메카’ 용인대에서 교수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점이다. 용인대 유도학과는 지금까지도 탄탄한 내부 결속력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한국 유도 파벌 이야기가 나오면 절대 빠지지 않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 울타리를 2005년의 전기영이 뚫었다. 개교 53년 이래 최초의 타 대학 출신 교수 타이틀을 얻었다. 그는 “내부 반대가 있었지만, 당시 김정행 총장님이 ‘비(非)용인대 출신으로 후배들의 좋은 본보기 사례가 되도록 열심히 하라’는 말씀과 함께 분위기 쇄신을 위한 획기적인 결단을 내리셨다”고 전했다.

 

그렇게 차가운 시선을 뚫은 그는 어느새 20년 가까이 제자들과 호흡 중이다. 그는 “공부하면 서울대 가듯, 유도는 용인대를 와야한다는 말이 있지 않나.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했다”며 “아이들이 졸업하고 각자 자기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늘 감사한 마음 뿐이다. 스승의 날에 걸려오는 따뜻한 전화, 그게 내 일의 가장 큰 보람”이라고 웃었다.

 

전기영 용인대 유도경기지도학과 교수가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촬영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스포츠월드 김용학 기자

 

◆여전히, 국가대표로

 

굳이 교수를 넣지 않아도 그의 커리어는 화려하다. 2004 아테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대표팀 코치로 직접 선수들을 지도했다. 2012 런던,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는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국제유도연맹(IJF)과의 특별한 인연도 뺄 수 없다. 그는 “2014년 경기 위원으로 처음 IJF 일을 시작했다. 공식 명칭은 커미셔너였다. 경기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준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고 시작을 되짚었다. 남다른 언어 실력 덕에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유도 세미나에도 부지런히 눈도장을 찍었다.

 

발로 뛴 시간들이 쌓인 2015년, 한국인 최초로 IJF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2020 도쿄 올림픽(2021년 개최)부터는 한국인 최초 IJF 심판위원장으로도 활약 중이다. “리플레이 모니터 앞에 앉아 매트 위 심판들의 실수를 줄이고 고쳐주는 역할을 한다. 국제 심판들을 감독하는 셈”이라는 간단한 직책 설명을 더한 그는 이번 파리에서도 쉼 없이 현장을 누비며 후배이자 제자들의 감동 스토리를 함께 했다.

 

전 교수는 “심판위원장을 한다는 상상도 못했다. 아시아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을 한국 대표로 해냈다”며 “나라의 얼굴이지 않나. 책임감을 가지고 공정한 판정을 내리는 것에 온 초점을 맞췄다”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이어 “4년마다 선거가 열린다. 내년 6월 헝가리 세계선수권대회 전후로 연임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선수 시절처럼, 나는 여전히 한국 대표다.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라고 웃었다.

 

◆한판승의 사나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어떤 유도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어려운 질문이네요”라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는 이내 “유도하면 늘 전기영 이름 석자가 떠올랐으면 싶다. 한판승의 사나이로는 제가 원조격이지 않나. 팬들이 짜릿한 장면들을 보며 ‘전기영이 옛날에 참 유도 잘했다’고만 떠올려주시면, 그것만으로 저는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따뜻한 미소와 함께 띄워보냈다.

 

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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