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북미 영화 박스오피스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주말 흥행 1위에 올랐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돌아보면 사반세기 전인 1999년 ‘극장판 포켓몬스터: 뮤츠의 역습’이 최초다. 그 충격 탓에 포켓몬스터는 당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표지로까지 등장했었다.
그런데 지난주 북미 박스오피스 상위권엔 일본영화가 한 편 더 있었다. 3위 랭크된 괴수영화 ‘고질라’ 프랜차이즈 30편 ‘고질라 마이너스 원’이다.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그보다 한 주 먼저 북미 개봉해 2주 연속 3위 자리를 지켰다. 고질라란 괴수 캐릭터 자체야 일본과 북미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상당한 인지도를 지녔지만, 일본 바깥에선 사실상 ‘미국산 고질라 영화’들만 메인스트림 흥행을 거둬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일본 도호영화사 오리지널 시리즈임에도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확실히 주목할 사건은 맞다.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집계가 시작된 이래 동일국가의 비영어 영화(영어 더빙으로 상영되더라도 일단은 비영어로 제작된)가 박스오피스 3위 내 2편 들어가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박스오피스 사건이 이제 전성기를 지나 쇠락해가고 있다 여겨지던 일본영화계로부터 나왔단 점에서 더더욱 놀랍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말이다. 살펴보면 몇 가지 실마리가 나오긴 한다.
일단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모두 ‘호평 마케팅’이 작동한 경우들이다. 본국보다 북미 평단 반응이 훨씬 좋았던 덕택이다. 로튼토마토 집계로 전자의 호평률은 96%, 후자는 97%다. 특히 전자는 내년도 아카데미상 장편애니메이션상의 유력후보로 거론되는 중. 또 어찌됐든 일본 애니메이션과 특촬물(특수촬영물)은 반세기 전부터 북미 등 서구시장서 일찌감치 소개돼 서구인들로부터 인지도가 상당한 상품들이다.
물론 그 정도만으로 지금 같은 상황이 나오진 않는다. 여기에 덧붙여져야 할 게, 현 시점 북미 영화시장 자체가 나름 ‘빈 집’이란 점이다. 지난주만 그런 것도 아니고, 올해 4/4분기가 대체로 다 그렇다. 최근 극적으로 타협된 미국 작가조합(WGA)과 배우조합(SAG) 파업 탓에 ‘듄’과 ‘고스터버스터즈 라이즈’ 후속편, 그리고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크레이븐 더 헌터’ 등 4/4분기 개봉 예정이던 기대작 블록버스터들이 모두 내년으로 개봉을 미루면서 ‘빈 집’이 발생하게 됐다.
그렇게 자국 블록버스터 진공 상태에서 소위 ‘땜빵’용으로 개봉시킨 영화들이기에 순위는 잘 나왔을지언정 흥행수익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단 것. 실제로 1위를 차지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지난 주말 동안 1301만1722달러를 벌어들이는 데 그쳤다. ‘고질라 마이너스 원’ 첫 주말도 1141만9975달러 수준.
그런데 또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아무리 자국 블록버스터 ‘빈 집’이더라도 그를 대신할 콘텐츠로 자국 중급규모 영화들이 아니라 굳이 일본 애니메이션과 일본 특촬물을 선택해 대형배급이 이뤄진 점에 대해서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북미 극장주들 입장에서 일본 애니메이션과 특촬물 쪽이 더 자신들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 판단해 벌어진 일이란 것. 실제로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북미 2308개 스크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2205개 스크린을 확보해 첫 주말 흥행에 나선 바 있다.
이유는 간명하다. 지난 4~5년 사이 일본 서브컬쳐 콘텐츠는 북미시장서 큰 폭으로 영역을 넓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돼있기 때문이다. 대표 격인 애니메이션만 해도 그렇다. 1999~2001년 ‘포켓몬 열풍’이 지나가고 난 뒤 거의 20년 가깝게 북미시장서 침체기를 맞이했지만 2019년 ‘드래곤볼 슈퍼: 브로리’가 3071만 달러 총수익을 거두며 흥행 가시권으로 재등장, 이후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4951만 달러, ‘드래곤볼 슈퍼: 슈퍼 히어로’ 3811만 달러, ‘극장판 주술회전 0’ 3454만 달러 등 승승장구 중이다.
일본만화 역시 2019년 미국서만 전년대비 26% 성장을 거두더니 2020년엔 44%. 2021년엔 무려 160% 성장이란 엄청난 폭증세를 보이는 중이다. ‘고질라’ ‘울트라맨’ ‘가면 라이더’ 등 특촬물도 마찬가지. 북미 등 서구에서 꾸준히 팬층을 늘려 레딧 등 SNS 언급량도 비약적으로 늘고, 일본서 ‘신(新)’자를 붙여 내놓고 있는 새 시리즈에의 관심도 상당하다.
더 크게 보면, 비단 일본 콘텐츠 상황만도 아니다. 엄밀히 K팝과 K드라마 등 K컬쳐 일대 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시작된 현상이다. 모두 2010년대 온라인 콘텐츠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대중문화시장 주류와 비주류 상품 경계가 희미해지고 서구 서브컬쳐 씬 저변에 있던 아시아 콘텐츠가 급부상하며 벌어진 일들이다. 특히 세계인들의 미디어콘텐츠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코로나19 팬데믹 기점으로 그 왕성한 소비욕구만큼 각종 서브컬쳐 상품들까지 대중에 적극적으로 소비되면서 드디어 ‘아시아 콘텐츠 대세’가 이뤄졌단 것.
그렇게 팬데믹 동안 K팝은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를 차지하고, K드라마도 대표적 OTT 넷플릭스에서 역대 최고 시청시간 기록도 차지하게 됐다. 일본 애니메이션도 팬데믹 동안 북미 극장흥행 상승세를 보이다 결국 주말 박스오피스 1위 자리까지 올랐다. 그리고 일본영화가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정확히 같은 시점, K팝 보이그룹 에이티즈는 정규2집 ‘The World Ep.Fin: Will’로 빌보드 앨범차트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했다. 2023년 세계 대중문화계 화두 ‘서브컬쳐의 역습’은 이렇듯 북미시장서 전 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난 11일 K컬쳐 주역 중 하나인 CJ ENM에서 80% 지분을 소유한 할리우드 제작사 피프스시즌이 도호인터내셔널을 대상으로 2억2500만 달러 규모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진행, 도호인터내셔널 측이 피프스시즌 2대주주(지분율 25%)로 올라섰단 소식이다. 도호인터내셔널은 바로 그 ‘고질라’ IP를 갖고 있으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일본 배급도 담당했던 도호영화사의 미국법인이다. ‘서브컬쳐의 역습’을 함께 만끽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은 그렇게 각자 장기 분야들을 앞세우며 사업적으로도 같은 배에 올라타 북미 진출에 힘을 합치게 됐다. 다가올 2024년이 기대되는 세계 대중문화산업의 ‘다음 단계’다.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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