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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171. 33년 만에 침묵 깬 '칠궁'

입력 : 2018-01-14 18:22:43 수정 : 2018-01-14 18: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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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처음으로 석촌동 백제고분군을 찾았다. 선원을 대학로로 옮기기 전에는 자주 찾았던 곳인데 바쁘다는 핑계로 발길이 조금 뜸해졌다. 지금 그곳은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돌무덤 주변을 돌면서 지금까지 살면서 무덤과 참으로 많은 인연이 있었음을, 그리고 오랜 시간을 역사의 흔적과 함께 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학창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인사동에서 보냈다. 지금이야 관광객들로 붐비고 현대식 상점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때만 해도 인사동은 전통 한옥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옛 한옥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던 곳이었다.

인사동과 지근거리에 궁들이 있다.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 종묘, 운현궁 등. 그 당시 궁은 지금과는 모습이 많이 달랐다. 예스럽다고나 할까. 아쉬운 것은 한동안 갈 수 없었던 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곳이 바로 ‘칠궁’이다. 칠궁은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 일곱 명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역사 속에 묻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칠궁은 원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를 모시는 사당으로 숙빈묘라고 했다가 나중에 육상궁이라고 바뀌었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와 영조의 후궁이자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영조의 후궁이자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그리고 후에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를 모시면서 칠궁이라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칠궁이 사적으로 지정된 초기에는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러다 1968년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면서 굳게 문을 닫았다. 칠궁은 청와대와 맞붙어 있는 궁정동에 위치한 관계로 일반인의 개별 출입이 불가능해졌다가 윤보선 대통령 시절 5개월 동안 칠궁이 개방됐다.

칠궁이 개방됐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칠궁을 구경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 생각했다. 서울의 모든 궁궐은 이미 구경을 마쳤기에 아담한 칠궁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칠궁 담을 넘어 들어갔다. 아름다운 경관에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사당과 재실이 눈에 들어왔다. 몰래 들어왔지만 우리는 감탄하고 말았다. 친구는 “담을 넘어 많은 궁을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멋진 궁은 처음이다”며 열린 입을 닫지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칠궁에서 뜻하지 않은 영가를 만났다. 숙종이 내린 독약을 먹지 않기 위해 발악했던 장희빈 영가를 만난 곳이 그녀의 사당인 대빈궁 앞이었다. 역사상 가장 독한 여자로 꼽히는 장희빈. 경종을 낳고 결국 중전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영가와 마주친 나는 순간적으로 놀랐고 생각과 다른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TV 드라마 속의 장희빈과 너무나 달랐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조선의 미인형이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작은 눈, 작은 입술을 갖고 있는 여인으로 지금의 미인 기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숙빈 최씨도 그다지 예쁜 편은 아니었고 엄 귀비는 전형적인 부잣집 맏며느리 형으로 통통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더욱 놀란 것은 장희빈 영가의 말이었다.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아 너무 시장하다는 것. 다른 영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칠궁에 계신 모든 영가 분들은 아무도 찾아주는 이가 없어 외롭고 굶주려 있었다.

정숙하고 소박한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칠궁이 지난 2001년 33년간의 침묵을 깨고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지금은 청와대 관람객에게만 칠궁 관람이 허용되고 있어 많은 이들이 다가갈 수는 없다. 학창시절에 만났던 칠궁 주인들의 외로움이 조금은 풀어졌기를 바란다.

(hooam.com/ whoiam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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