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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98. 영험한 땅과 수도가 될 땅은 다르다

입력 : 2017-04-19 04:40:00 수정 : 2017-04-18 18: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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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의 존 리드 하지 중장이 우리나라, 정확히는 38도선 이남에 진주했다. 이른바 주한 미육군사령부 군정청(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이다.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주한미군 제24단장을 겸임했다.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 청사 앞마당, 즉 경복궁에서 국기하강식이 열렸다. 하지 중장 등 미군 8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대형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광복이라는 봄은 분명 왔지만, 아직 진짜 봄은 아니었다. 일제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됐건만, 나라의 주인으로 권리를 행사하기도 전에 미군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조선 총독들에게 내주었던 경복궁 터는 이렇게 미국의 군정장관에게 넘어갔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미 군정청, 조선총독 관저는 미군정장관 관사로 쓰였다. 청사 제1회의실은 군정청 회의실, 관저는 미군정 최고사령관 하지가 사용했다. 하지는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꿨고 샤워장도 설치했다. 이것은 일본이 사용했던 조선 수탈의 상징적인 장소를 점령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는 사실상의 경복궁 주인으로 1년 반을 살았다. 미군정은 또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중앙청(Capital Hall)으로 개명했다.

미군정은 일본인 재산을 접수, 관리했다.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그 수입을 몰수했다. 이름 하여 ‘귀속재산’이다. 토지와 은행, 광산 등을 포함한 기업체, 주식, 주택, 선박 등이었다. 생산력 후퇴, 통치기구 붕괴, 자본가(일본인) 소멸, 사회주의 세력 발호 등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남한의 자본주의를 되살리는 데 주력했다. 미국은 남한을 반공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했다. 1948년 미국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을 위해 그 해 5월 10일 단독 선거를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단을 원치 않는 국민의 저항이 시작됐다. 경복궁 터에서 기획된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案)은 멀리 제주도에 불을 붙였다.

제주항쟁을 겪으면서 제주는 인구의 3분의 1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하지가 청와대를 숙소로 택하지 않았더라면, 경복궁의 저주에서 빗겨나 있었더라면, 한국의 현대사는 과연 달라졌을까. 어쨌든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하지는 이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채 잊혀졌다.

경복궁 터의 저주는 철저하고 정확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과 미군정시대를 지나 현대사로 넘어오면서 경복궁 후원 터인 경무대 관사 36호에선 이기붕 일가가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예조 판서를 지낸 이기붕의 조부가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가짜 국장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한 장소다. 손자와 조부가 같은 자리에서 황천에 간 셈이다. 50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선 의친왕을 낳고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귀인 장씨(훗날 숙원 첩지를 받음)가 명성황후의 투기로 중한 상해를 입고 후유증으로 죽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기붕 일가의 몰살, 박 대통령 시해, 노태우·전두환 대통령의 수형생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자제의 계속되는 수형과 검찰조사,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등 경복궁 터의 비극은 그렇게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청와대 터는 산 자의 터가 아닌, 죽은 영혼의 터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자만이 가능하다. 천도(天道)를 어기면 그 즉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북악산의 바람은 유난히 매서웠다. 도대체 누가 저 터의 주인이 될 것인가.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아무리 기가 센 대통령이라도 청와대 기운을 이기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역대 대통령들은 청와대를 옮기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대표적인 장소로 계룡산 신도안이 거론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언젠가 달을 보며 수행하던 중, 한 수좌가 “전설에 미륵불상의 빛깔이 하얗게 되면 이곳 신도안으로 천도가 된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알듯 모를 듯 미소로 답했다. 예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신도안 천도를 진행했지만 미륵불 전체가 하얗게 변하지 않은 탓인지 천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땅이 영험한 것과 수도가 될 땅은 분명 다르다. 이후 가끔 계룡산 신도안을 찾을 때면 수좌의 말을 생각하며 미륵불을 찾아본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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