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월드

검색

[차길진과 세상만사] 95. 조선총독의 비극은 명성황후의 복수였나

입력 : 2017-04-10 04:40:00 수정 : 2017-04-09 18:40:54

인쇄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지 273년만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 중건됐다. 고종이 12세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이 섭정해 국사의 모든 결정권을 쥐었다.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할 필요가 있었다. 약 3년에 걸친 공사 중 화재로 인한 손실도 있었고, 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상소가 올라오는 등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폐단이 끊이지 않았지만 대원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글과 그림을 팔았으며 매관매직도 하였다. 그 마저도 모자라 당백전을 발행했다. 대원군은 이처럼 경복궁 중건에 무리수를 둔 것은 전생의 카르마 때문에 경복궁을 폐허로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1872년 경복궁은 대원군의 노력으로 마침내 제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경복궁 터는 대원군에게 고마워하기보다는 대원군을 몰락의 길로 몰아갔다. 그 시작은 중전 간택이었다. 명성황후는 흥선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간택되어 16세 때 왕비가 됐다. 고종보다 한 살이 많은 명성황후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여자’라는 성(性)으로 속내를 가리고 있었을 뿐 권력욕도 남다른 여걸이었다. 을미사변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성황후는 시아버지 대원군과 갈등했다.

대원군이 궁녀 이씨가 낳은 왕자 완화군을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하려는 의도에 맞섰다. 노론과 연합해 신흥 남인(南人), 일부 북인(北人) 세력과 맞섰다. 구체적으로, 명성황후는 조성하 등 조대비(趙大妃) 세력과 조두순, 이유원 등 원로대신들, 김병국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대원군의 장남과 형, 최익현으로 대표되는 유림을 끌어들여 대원군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최익현이 대원군 규탄 상소를 올리자 명성황후 캠프는 기다렸다는 듯 대원군을 하야(下野)시켰다.

일단 패퇴한 대원군은 1894년 동학 농민운동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다. 정국이 꼬이자 일본과 손을 잡았다.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조선 침략을 노골화 하던 일본은 눈엣가시와도 같은 명성황후를 제거할 적임자로 대원군을 선택했다. 당시 일본의 야욕을 감지한 명성황후는 일본의 지원을 받는 개화세력에게서 국가의 위기를 읽고 있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파워 만으로는 일본의 기세를 막을 수 없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진주시킨 채 압력을 행사했다.

어쩔 수 없이 명성황후는 러시아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친러정책으로 일본과 대항하려 했다. 그런 명성황후가 일본에게는 최대 걸림돌이었다.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본국과의 협의 하에 자신들의‘국익’을 위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짰다. 1895년 10월 8일, 일본군과 낭자잡배(浪者雜輩)들이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이다.

여기에 가담했던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은 당시 군인으로 유일하게 명성황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다. 훗날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했던 우장춘 박사는 부친이 국모를 시해한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속죄하기 위해 동경대를 졸업한 뒤 식물학자가 되어 나라에 봉사했다. 명성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조선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1905년 일본총리대신까지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남산 왜정대 통감관저에 도착한다. 제1대 조선통감이 된 것이다. 그는 조선을 속국으로 만든 뒤, 멀리 만주와 중국을 아우르는 대일본제국을 만들 야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4년 후, 실패한 조선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암살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된 후, 역대 조선통감과 총독들은 줄줄이 비명횡사하거나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조선총독들의 불운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나는 명성황후의 저주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경복궁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있다가 덕수궁으로 환궁해 세상을 떠났고,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은‘창덕궁 이왕(李王)’으로 강등돼 유폐되었다가 대조전에서 붕어했다. 조선의 왕조차 거부했던 경복궁을 일본이 마구 부수고 왕실을 무력화시키자 터도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으리라.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연예 스포츠 라이프 포토

연예
스포츠
라이프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