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득할 수밖에 없는 패배다.
임도헌 감독이 이끄는 한국 남자배구 대표팀이 ‘항저우 참사’를 겪었다. 금빛 꿈을 품고 입성한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대회 공식 개회식이 펼쳐지기도 전에 메달 경쟁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시작부터 덜컹거렸다. 인도(73위), 캄보디아(랭킹 없음)와 C조에 묶인 한국(27위)은 조별리그 첫 경기 인도전부터 대이변의 희생양이 됐다. 풀세트 접전 끝 2-3으로 패했다. 아마추어 수준의 캄보디아를 잡아내 가까스로 조 2위는 사수했지만 찝찝함이 남았다.
그렇게 12강 토너먼트에 도착해 D조 1위 파키스탄을 만났다. 파키스탄은 중동 특유의 우월한 피지컬에 유럽 배구를 접목시키며 기본기와 기술적 측면에서의 발전을 이루는 중이다. 임도헌호가 지난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꺾었던 상대지만, 당장 패해도 이상하지 않은 난적이었다.
결국 0-3 셧아웃 패배라는 처참한 성적표만 남았다. 이렇다 할 반격조차 못 한 완벽한 패배였다. 2m가 넘는 신장으로 공격을 퍼붓는 상대의 날개 공격수들을 제어하지 못했고, 높이에서 나오는 블로킹 격차도 극복하지 못했다.
배구가 신체조건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종목인 것은 맞다. 하지만 기본기를 구비하고 전략·전술 측면에서 탄탄한 준비가 수반된다면 마냥 무너지는 법도 없다. 일본이 좋은 반례다. 일본 남자배구는 2023 세계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아시아 역대 최고 성적 3위를 쓰는 기염을 토했다. 신장은 부족하지만 이를 메우는 민첩한 움직임과 기본기, 조직력을 앞세운 ‘원 팀’으로 단점을 극복한다.
그런 필수적인 준비조차 한국은 크게 부족했다. 상대도 이를 느낄 정도였다. 파키스탄의 라미레즈 페라즈 감독은 경기 후 “우리는 전술적으로 많은 것들을 준비했고, 로테이션마다 상대가 뭘 할지 알고 있었다”며 “잠도 거의 자지 못하며 경기를 준비했고 그것이 통했다. 상대는 우리의 경기 플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게 우리 전략이었다”고 말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한 파키스탄의 라자 무바사르도 “한국은 중요한 첫 번째 공격을 많이 잃었다. 서브에서도 많은 범실이 있었다”며 “공격 세팅에서도 그들은 잘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내놓았다. 반론하기 힘든 냉혹한 현실이었다.
상대의 눈에도 보일 정도의 미숙한 경기 준비였다. 1962년 자카르타 대회 이후 61년 만의 ‘아시안게임 노메달’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1978년 방콕, 2002년 부산, 2006년 도하 대회에서의 금메달을 포함해 아시아에서만큼은 강세를 보여왔다는 자만과 방심이 최악의 결과물로 이어졌다.
항저우=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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