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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8-04-08 18:41:59, 수정 2018-04-08 18:41:59

[차길진과 세상만사] 195. 전쟁고아들을 위한 야학

  • 며칠 전 K대학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1954년 선친이신 차일혁 경무관이 충주경찰서장으로 재직 시 근로청소년을 위해 야학을 개설하였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그 당시의 관련 자료가 있다면 대학박물관에 전시하고 싶다는 교수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대학에 기증할 만한 자료가 있는지 찾아보면서 나는 잠시 어린 시절의 충주로 돌아갔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개 치던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사살된 후 남한은 평화가 찾아왔고 선친은 충주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 숨어있던 공비 잔당들에 대한 토벌도 끝났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전쟁의 피해를 겪은 도시들이 그러듯이 충주에는 유랑소년들이 많았다. 부모와 집을 잃고 갈 곳 없는 소년들은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등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곳곳이 폐허가 된 나라에 소년원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오갈 곳 없는 전쟁고아들은 굶주림에 범죄에 노출되기 쉬웠다. 당장 배고픔을 면하는 것도 급하지만 이들이 장차 제대로 된 직업을 갖고 건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글을 가르치고 직업교육을 시켜야했다.

    차일혁 경무관은 아이들을 위한 야간학교를 만들기로 하였다. 경찰서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선친의 뜻에 기꺼이 동참하였다. 많지 않은 경찰 월급에서 조금씩 거둬 ‘충주직업청소년학원’을 개설하였다. 반듯한 건물을 세울 수는 없어 경찰서 운동장 한 모퉁이에 판자로 건물을 짓고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60명이 들어가는 교실에 80여 명이 모여들어 좁지만 그렇게 수업이 진행되었다.

    전쟁 중에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아이들인지라 그 중에는 20세가 다된 학생도 있었다. 모두들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의만큼은 뜨거웠다. 사실 교육 사업은 지역 경찰서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학을 개설한 것은 폐허의 나라를 재건하는 데는 배움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고된 일을 마치고 온 아이들은 졸지도 않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선친의 기쁨이었고 보람이었다.

    배움의 장을 만들고 나니 빨치산들과 전투를 하면서 피로 얼룩진 몸과 마음이 씻겨 내려가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고 선친은 술회했다. 당시 충주에는 전국에서 제일 큰 공사인 충주비료공장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경찰이 할 일도 많았을 시기였다. 그럼에도 치안유지는 물론이고 교육과 문화예술에 많을 일을 하셨다.

    충주는 예로부터 남북의 요충지로 사람과 물자가 중원에 모였다가 다시 갈라진다고 했다. 인근 도시에 도청의 자리를 내주면서 충주의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비료공장 건설과 문화시설을 갖추면서 활기를 되찾아갔다. 전국의 기술자와 노무자가 대거 충주로 모여들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노무자의 월급이 관공서 공무원보다 6~7배나 많았다 한다. 한 마디로 돈이 되는 공사였던 셈이다. 그렇게 폐허의 상처를 안은 충주를 재건하기 위해 경찰서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하셨다.

    선친께서 진해경찰서장으로 떠나기 전 못내 아쉬워 그 마음을 육성으로 남기셨다. “충주직업소년학교를 초등교육에서 중등교육으로 올려놓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며 “유지들께서 뜻을 이어 저 불쌍한 아이들을 장래 교육을 부탁합니다”라고 선친의 애절한 소망이 육성녹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충주의 야학은 1961년 운영난으로 폐교되었다. 졸음을 쫓아가며 공부를 마친 학생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유능한 인재가 되었으며 특히 충주 발전에 힘을 쏟았다. 몇 해 전에는 노인이 되신 졸업생들이 나를 찾아와 뒤늦은 고마움을 전해와 선친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hooam.com/ whoiam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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