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성석린에서 시작된 한성부 판윤은 1905년 박의병까지 조선시대 511년 동안 1370명이 자리하였다. 그중에는 황희정승, 맹사성, 박문수, 서거정과 같은 뛰어난 인물들이 한성판윤의 자리를 거쳐 갔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친가는 물론 외가의 3대 혈통까지 꼼꼼히 따져 당파에 크게 치우치지 않는 가문의 인재를 한성판윤으로 등용했다.
자리에 비해 한성판윤의 월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쌀 두 섬과 콩 한 섬 다섯 말이 전부였고, 이권(利權)이라 해봤자 3년에 한 번 호적정리를 한 뒤 남는 파지를 한성부 관리들에게 나눠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종이가 무척 귀하던 시절인지라 꽤 짭짤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위상이 높았던 한성판윤도 갑오개혁 이후 위상이 급격히 전락하고 만다. 16년 동안 사람이 70번이 바뀌었으니 일인당 평균 80일씩 근무한 꼴이었고, 1849년 7월에는 반나절 판윤도 있었다. 갑오년 한해만 해도 21명의 판윤이 갈렸으니 보름에 한 사람씩 갈려나간 셈이었다. 이는 곧 국가적 혼란기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울시장은 정치와 무관한 듯 보여도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때문에 자리를 내놓은 서울시장도 있었고, 청계천을 복원하고 대권에 도전하여 대통령이 된 서울시장도 있었다. 무난하게 임기를 마치고 조용히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퇴임 후에도 정치권의 공격을 받은 사람도 있다. 그만큼 어려운 자리인 것이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맨해튼에서 만난 사업가가 한국에 돌아가 정치하겠다는 야심을 피력했다. 그 사업가는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될 인물은 못됩니다. 제 꿈은 서울시장입니다.” 조선시대 한성판윤에 대한 기록을 자주 봐온 나는 “서울시장이야말로 대통령 못지않게 어려운 중책입니다”라고 내 나름대로 서울시장에 대한 생각을 말했더니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과거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많게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구명시식을 청했다. 사업에 성공했지만 고국에 돌아가서 해야 할 숙제가 있다고 했다. 이를 염려한 부모님영가는 “이미 너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했는데 구태여 한국에 가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냐? 벼슬할 생각일랑 잊어버리고 평생 상도(商道)를 걷도록 해라”라고 했다.
나 역시 부모님영가의 말씀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으로 거부가 된 유태인들은 이스라엘로 돌아가 정계에 뛰어들지 않는다. 장사로 성공했으면 그것이 천직임을 알고 외도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맨해튼의 사업가는 한국으로 돌아가 금의환향할 생각부터 했다. 자기가 하면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정계에 발을 들여놓으려 했다.
“아버님을 대신해서 한국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싶습니다.” 그는 속내를 밝히며 뉴저지 후암선원 앞에 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졌다. 나는 “아무리 좋은 나무도 인간의 편리함 때문에 잘림을 당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을 푸는 목적으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가차 없이 배척당하고 잘림을 당하는 것이 정치입니다”라고 충고했다.
얼마 후 사업가는 한국으로 떠났고 정치권에 줄을 대고 있다는 얘기는 들렸지만 더 이상 그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집안의 한 때문에, 또 유명해지려고 정치권에 접근했으니 그것이 통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한 길을 가라는 부친영가의 당부를 가슴에 깊이 새겼기를 바란다.
(hooam.com/ whoiam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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