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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9-10 19:01:47, 수정 2017-09-10 19:01:47

[차길진과 세상만사] 138. 아름다운 '은퇴 투어'

  •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의 야구장 스탠드는 1959년에 세워졌다. 지금 생각하면 동대문운동장 시설은 열악했지만 우리나라 스포츠의 산실이었고 많은 스타들이 나왔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학교에서 가까운 동대문야구장에 자주 갔었다. 야구 경기에 열광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어느 날 경기를 보던 중 4번 타자의 홈런이 터졌고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선수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런데 구석에서 ‘저 선수는 영민이 보다는 못해’라는 소리가 들렸다. 흥분의 도가니였던 관중석에서 그 노인의 목소리만 귀에 박힌 것이다. “영민이가 누구예요?” 예순이 넘어 보이는 노인은 내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네 나이면 이영민을 모르겠지. 일제강점기 때 이영민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정말 굉장했지. 사람들은 백인천 선수와 이영민 선수를 비교하지만 나는 이영민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고 했다.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도대체 이영민 선수가 얼마나 야구를 잘했는데요?”

    그러자 그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아시아 최고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이영민 선수의 친구이자 팬이었다면서 이영민 선수에 대한 자랑을 계속했다. 노인은 “이영민 같은 선수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예언처럼 남긴 채 사라졌다.

    이영민 선수는 1905년 대구 출생으로 대구 계성학교 야구부에서 서울 배재고보로 스카우트될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다. 이후 연희전문 졸업반 시절에는 연희전문 대 경성의전 정기전에서 국내 선수론 최초로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기록했다. 1933년에는 일본 요미우리사 주최의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이 참가한 미국 올스타팀과의 게임에 조선 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조선 최고의 야구선수였던 그는 인물 또한 출중하고 인격도 훌륭했다. 해방 후,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라운드를 누비다 1954년 8월 아들 친구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야구 스타의 말로 치고는 너무나 허무했다. 이후 1958년부터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영민 타격상’을 만들었다.

    노인과의 만남이 있은 후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이영민 선수를 다시 떠오르게 한 야구선수가 있다. 바로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다. 이승엽 선수는 이영민과 같은 대구 출신으로 이영민이 세상을 떠난 8월에 태어났다. 처음에는 투수였다가 후에 홈런타자가 된 두 사람의 공통점은 과연 우연일까. 패션쇼에 설 정도로 잘 생긴 외모의 이승엽 선수의 눈매는 이영민 선수와 여러모로 비슷했다.

    지독히도 일본인을 싫어했던 이영민 선수처럼 이승엽 선수는 귀화한 중국계 일본인 왕정치 선수의 55호 홈런 기록을 깨뜨렸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일본을 4위로 밀어내 한국이 동메달을 차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39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왕정치 선수의 기록을 깬 이승엽 선수를 보면서, 일제강점기 시대 국내 선수로는 최초로 홈런을 날려 민족의 한을 한 방에 날렸던 이영민 선수가 생각나는 것은 왜 일까.

    “진정한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는 이승엽 선수는 현재 은퇴 투어 중이다. 타고난 실력도 있지만 언제나 노력하는, 성실한 그는 최다 홈런, 최다 타점, 최다 득점, 최다 루타 등 모두가 최고다. 그래서 KBO가 한국야구사에 남긴 그의 발자취를 기념하기 위해 각 구단에 투어를 제안해 이뤄진 것이다.

    지금까지 왜 야구선수의 은퇴 투어가 없었을까. 그것은 선수가 실력 외에도 인품을 겸비하지 않고는 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야구인이 아닌 사람도 존경을 하는 선수였기에 그의 은퇴투어가 아름다운 것 아니겠는가. 이 아름다운 은퇴 투어를 계속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hooam.com/ whoiam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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