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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4-03 04:40:00, 수정 2017-04-03 04:40:00

[차길진과 세상만사] 93. 총독을 위해 터를 잡은 지관

  •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되었다. 법원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에서 박 전 대통령은 혐의에 대해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총체적 공백상태다. 주한 미국 대사와 일본 대사가 동시에 공백이고 대통령도 없는 기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여러 가지 정치 외교적 이유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청와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청와대에서 살지 않았다면 지기(地氣)로 인한 피해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꿈이었던 9선의 국회의원 김영삼은 통일과 평화에 누구보다 관심을 쏟았다. “필요하다면 야당 총재로서 북경 정부를 방문해 한반도 평화정착에 관한 협의를 하겠다. 남북대화를 재개해 우리 스스로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는 얘기를 이미 1975년에 했다. 그러나 당시는 반공과 멸공을 외치던 시절이었다. 김영삼은 이 발언 때문에 긴급조치 9호에 걸려들고 말았다.

    김영삼은 1979년 YH무역 여성노동자들에게 신민당사를 농성장으로 내줬다. 그 때문에 국회의원에서 제명되고 총재직까지 잃었다. 하지만 김영삼은 정치적으로는 이겼다. 유신정권의 붕괴는 김영삼 탄압 때문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쿠데타 정권과 맞서 싸운 김영삼이 가택연금을 당하자 23일간 단식투쟁하였고 결국 승리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 민주산악회가 움직일 때마다 군사정권은 조금씩 힘을 잃어갔다.

    1993년 2월25일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김영삼은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의 처벌을 받도록 했다. 정부수립 이래 누구도 도려내지 못했던 국가의 암세포를 김영삼은 단기간에 제거해 나갔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일어난 각종 사고들은 문제가 된 불상 외에도 청와대 뒷산에 절벽처럼 생긴 바위가 화근이었다.

    그래도 청와대 터가 유일하게 ‘봐준’ 대통령이 김영삼이다. 청와대의 살기 속에서 그 정도 상처만 입고 물러난 것도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의심하지 않고, 좌고우면하지 않고, 옳다 싶으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김영삼의 단순명료한 추진력에 청와대의 흉한 기운은 저주를 행사할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김대중 시대라고 해서 청와대 터의 지기(地氣)가 변할 리 없다. 청와대는 여전히 논이나 습지에 적합한 땅이었다. 사람이 살던 곳이 아니었다. 산은 침식됐고, 암반은 양쪽으로 허옇게 드러나 있다. 계곡도 깊게 패있다. 습한 땅 문제는 건축공법으로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북악산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스스로 작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마구 우쭐대는 독불장군 꼴이다.

    왼쪽의 인왕산, 오른쪽의 둔덕에 감싸인 북악은 앞이 훤히 트였다. 눈을 가리는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오만해질 수밖에 없다. 북악의 방향은 대통령의 시선과 일치해 청와대 밖에서 아무리 냉철하고 주도면밀했던 사람이라도 북악 아래에서 장기간 숙식하면 북악과 착각과 오판을 공유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는 노벨평화상 수상 과정의 의혹과 아들과 측근들의 구속, 퍼주기 식 대북정책을 빼면 이렇다 할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5.16 쿠데타 이후 30년간 납치, 테러, 사형선고, 옥살이, 망명, 가택연금 등을 겪다가 황혼 길에 이르러서야 4전5기, 청와대의 주인이 된 고단한 인생을 청와대 터가 배려한 것이다.

    이승만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한 나라의 대통령에 올랐다면 보통 운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소위 명당(明堂)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대통령들이 청와대만 들어가면 끝이 좋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영적으로 볼 때, 청와대 터는 산 사람의 터라 할 수 없다. 사람이 살만한 장소가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관저를 지을 때 조선인 지관이 잡아준 터가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 때 구 관저 건물 터를 헐고 새 건물로 이사를 갔다하나 터 안에서 자리만 바꾸었을 뿐이다. 조선지관은 일본 총독을 줄줄이 황천 보낼 속셈으로 사자(死者)터를 잡아줬는데, 그 터에 대한민국 대통령들이 들어가 살았으니 어찌 근심이 끊이지 않겠는가. 이제 지기를 누를 자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 끝을 내야 할 것이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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