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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73. 우공(愚公)의 마음으로 고전을 번역하는 사람

입력 : 2017-01-11 04:40:00 수정 : 2017-01-10 18: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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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반만년임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문화와 유산들은 유네스코의 인정을 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긴 역사와 문화기록을 우리는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료가 온통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은데 말이다. 이럴 때는 번역이 필요한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학자나 연구원들을 통해 번역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나 서고에 쌓인 선조의 자료는 너무도 많다. 문화유산이 많은 게 이럴 때는 마냥 좋다고 할 것이 아닌 듯 싶다. 그러다보니 관련분야의 연구 또한 더딘 형편이다. 문제는 전통분야 자료의 제대로 된 번역을 위한 시간 부족에 있다 할 것이다.

이런 문제는 일찍부터 학계와 문화계 원로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한 바 있다. 그 결과 1965년 한국 전통학문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취지를 모아 ‘민족문화추진회’를 만들었다. 그렇게 40여 년 동안 고전번역에 힘써왔다. 그리고 2007년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인 고전번역 사업을 위해 ‘한국고전번역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지금까지 ‘조선왕조실록’ 완역 등 많은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번역해야 할 것들과 비교한다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고전은 전체 자료 중 20%를 넘지 못하고 있다. 남아있는 고전 번역도 지금의 번역속도로 계산하다면 100년은 족히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가 번역된 조선시대 ‘승정원일기’의 경우 전문 번역자 50여 명이 매달려도 앞으로 42년은 더 해야 마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장학금을 지원하고 인재양성을 하고 있지만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부 주도의 고전번역 사업이 있었다면 그보다 앞서서 한문강습을 통해 후진 양성에 나선 한학자가 있었다.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으로 1963년 11월 일반인을 대상으로 종로구 수표동에 한문교육을 위한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제대로 된 강습실도 없어 독지가의 도움으로 강좌를 열었고, 나중에는 기업의 후원을 받아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원했다. 1976년에는 남양주시에 지곡서당(芝谷書堂)을 세워 한학(漢學) 연구의 아카데미가 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후원하던 기업의 지원이 끊어졌다. 각종 시국사건에 연루되었던 임창순 선생이기에 기업 입장에서는 지원이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 후 한림대학교에서 연구소 운영의 뜻을 비치자 임창순 선생은 갖고 있던 토지와 집, 그리고 서적 일체를 한림대에 무상기증하고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연구소 운영에만 전념하였다. 이 연구소를 졸업한 수백 명의 제자들은 대학에서 역사, 문학, 철학 등 많은 분야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2014년 한림대학교의 지원이 끊어진 태동고전연구소는 지금은 서울 종로의 한 오피스텔에서 연수생을 모집하여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열심히 고전을 연구하여 사람의 도리를 밝힐 뿐 어찌 공명을 위해 본심을 져버리랴. 먼 앞날 장한 뜻 여기서 시작되었으니 꿈속엔들 이곳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聊將理義明人極 豈爲功名負素心 萬里鵬圖從差始 也應夢繞舊棲林)’ 임창순 선생이 1988년 태동고전연구소 졸업전례 자리에서 직접 쓴 자작시이다. 이는 태동고전연구소에 대한 남다른 사명감과 애정을 시로 표현한 것이리라.

지금 세대는 한문과 친하지 않다. 한문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옛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도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전통자료의 번역은 단순히 한글화하는 작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잊혀진 옛 기억들을 되살리는 작업이며, 그 기록들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배우고자 하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 기록을 챙기지 못하면 중국의 기록에 의존하거나 일제강점기 때 저술된 왜곡된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옛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어찌 오늘을 안다할 수 있겠는가.

취업을 준비 중인 젊은 세대에게 인문학은 관심분야기 아니다. 반면에 기업에서는 인문학을 경영에 응용하고 있다. 아이러니하면서도 이제야 우리가 고전의 깊은 의미를 안다고나 할까. 다행스러운 것은 수년의 연수과정을 견디며 한학에 도전하는 젊은 연수생들이 꾸준히 있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라면 옛날 우공(愚公)처럼 번역을 당대에 다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에 계속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전은 그저 간직하라고 남긴 것이 아니다. 널리 세상과 공유하라는 천명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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