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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56. 촛불시위에 싸여버린 청기와

입력 : 2016-11-14 04:40:00 수정 : 2016-11-13 18: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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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기와(靑瓦)는 청자로 만든 기와를 말한다. 그런데 이 푸른빛의 청기와는 아무나 만들 수도 없고 돈이 있다고 해서 건물에 청기와를 얹을 수도 없었다. 고도의 제작 공법이 필요해서 청기와를 만들 수 있는 장인도 드물었다. 청기와 제작기법은 철저히 비밀로 했다. 죽을 때 자식에게도 그 비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해서 ‘청기와 장수’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그래서 청기와 제작 기술은 대를 이어 전수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청기와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고려사’에 보면 “의종 11년(1157년) 봄 4월 고려궁 후원에 연못을 팠다. 거기에 정자를 세우고 그 이름을 양이정(養怡亭)이라 했는데, 양이정에 청자 기와를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주로 왕실에서 사용했던 청기와는 중국 황실에서 유행한 것으로, 평기와에 유약을 발라 청색이 나도록 구워낸 것이다. 평기와에 비해 제작비가 많이 들어 왕실이라 해도 쉽게 사용할 수 없었다.

이처럼 청기와는 화려하지만 만들기가 쉽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기와를 사용한 것은 아름답고 권위를 상징하기에 적절한 것으로 인식한 듯 하다. 조선 초기 궁궐 건물로는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만이 청기와를 사용했고, 궁궐 외에는 원각사, 탕춘대 등 일부 왕실관련 건물에 청기와를 사용했다. 현존하는 전각으로는 유일하게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이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조선 초기 태종 이방원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법궁인 경복궁으로 환궁하기를 거부했다. 자신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를 죽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픈 기억으로 이방원은 창덕궁이 완성될 때까지 신하인 조준의 집에 기거했다. 경복궁의 근정전 청기와는 그렇게 악연으로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籐淸正) 부대를 따라 한양에 들어온 승려 제타쿠(釋是琢)는 청기와로 이은 궁궐의 모습을 보고 그의 종군기 ‘조선일기(朝鮮日記)’에 “지붕에는 유리기와를 덮었는데 잇단 기와 줄마다 푸른 용 같다”고 기록했다. 그 정도로 청기와를 얹은 궁궐은 유리처럼 빛을 내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전란으로 파괴된 궁궐을 복구하기 위해 광해군은 중국에서 회회청이라는 염료와 염초를 수입해 청기와를 구웠는데 이래저래 많은 돈을 지출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전북 정읍에는 민족종교 보천교의 십일전(十一殿)이 있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경복궁을 훼손하자 보천교는 정읍에 경복궁과 광화문 등 궁궐을 본 따 본부를 지었다. 이때 중국에서 청기와 장인을 불러 십일전 지붕을 덮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보천교를 유사종교로 몰아 강제 해산했다. 그 후 1938년 경매로 팔린 십일전을 해체해 현 조계사 대웅전과 내장사 대웅전을 짓는데 재활용했다.

1937년 일제가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던 조선총독 관저를 경복궁 후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경복궁의 수많은 건물들이 파괴됐다. 그 지붕의 기와가 바로 십일전에서 뜯어온 청기와였다. 청와대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후 관저의 주인들은 줄줄이 제 명에 죽지 못했다.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종전 후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무기징역을 받았고, 1955년 병사했다. 8대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역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중에서 사망했다.

해방 후에도 그 터에 자리 잡은 주인들은 대부분 그 운명이 순탄하지 못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하야(下野)했고, 윤보선‧최규하 대통령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시해됐고,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은 수감됐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도 아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등 청와대 생활이 편안치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9년 봉하마을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했다.

풍수가(風水家)들은 경복궁과 창덕궁 터를 서울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북악산의 기운이 청와대를 자꾸 밀어낸다고 말한다. 그 결과 청와대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주인들은 대체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 때 구 건물을 허물고 지금의 새 건물을 지어 그 악연이 끊어지나 했지만 청기와란 이름을 달고 있어서인가 그 후에도 청와대 주인의 끝이 좋지가 않았다. 지금 청와대 주인은 퇴진을 요구하는 수십만 촛불시위에 직면하게 됐다. 그저 풍수나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으면 한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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