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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40. 자손이 자주 찾아야 명당

입력 : 2016-09-12 04:40:00 수정 : 2016-09-11 18: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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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인 1996년 4월에도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다. 4.11 총선을 앞두고 몇몇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나에게 “이번 국회의원 총선은 어떨 거 같습니까”라고 물었다. 갑작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음... 신한국당은 140석에서 1석이 모자란 의석을 확보하겠고 북한이 신한국당을 돕는 사태가 벌어지겠습니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신한국당의 박찬종, 그리고 민주당의 이기택 총재는 금배지를 달지 못하겠네요” 그러자 갑자기 지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말이 없어졌다. 의석수에다 북풍이라니.

총선 개표가 있던 날, 결과는 그대로였다. 신한국당 당선자는 정확히 139명이었고, DJ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호감이 높았던 박찬종, 이기택 의원까지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못했다. 개표 전까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변 중의 이변이었다. 게다가 총선기간 중 판문점 비무장지대에서 난데없는 북한군의 총격사건으로 안보문제가 떠오르며 보수층들이 신한국당에 힘을 실어주었다. 총선 정국은 물론이고 북한의 총격사건까지 발생하자,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오는 전화에 한동안 시달림을 당했다. 알려고 해서 안 것이 아닌데, 어찌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1998년 6월 초 서울 용산의 C호텔에서 풍수가로 유명한 손석우 옹(翁)과 공직자 A씨, 절친 P교수와 점심을 함께 했다. 손석우 옹은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5대에 걸쳐 대통령 집안의 묏자리를 잡은 자칭 타칭 ‘왕을 만든’ 국사(國師)로 불렸다.

풍채 좋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손 옹은 기가 대단했다. 손 옹과 나는 선문답식의 대화를 나누며 시종일관 묘한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는 농담 삼아 “교수, 지관, 종교인, 공직자가 만났는 데, 과연 우리 넷 중에 밥값은 누가 내게 될까요”라고 묻자 손 옹은 무척 당황해했다. 지금까지 사람을 만나면 풍수와 관련된 카운슬링을 많이 하신 터라 밥값을 내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A씨가 웃으며 “공무원도 밥값 잘 안내기로 유명하지만 오늘은 제가 세 분을 모셨으니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분위기는 한층 유쾌해졌다. 그때였다. P교수는 손 옹에게 “오는 6월20일에 차 선생의 부친 차일혁 총경 공적비가 구례 화엄사에 세워질 예정인데 참석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손 옹은 반색하며 “마침 화엄사에 가고 싶었습니다. 화엄사와도 인연이 있고, 차일혁 총경님과도 인연이 있으니 꼭 참석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손 옹을 보며 "아마 참석하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못 갈 것 같습니까” 그는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제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화엄사에 오시기보다는 서둘러 주변정리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말에 손 옹 뿐만 아니라 같이 있던 두 사람의 얼굴도 사색이 되고 말았다.

“너무 오버하는 거 같아요. 좋은 자리에 왜 그런 험한 말을 하십니까” P교수는 애써 나를 말렸고 그날의 식사는 그렇게 어색하게 끝났다. 식사 후 P교수는 나를 쿡쿡 찌르며 “괜한 말씀 아니죠? 진짜 손 옹이 주변정리를 해야 한단 말입니까? 말씀 좀 해보소” 더 이상은 말하기 힘들었다. 함부로 할 얘기는 아니었는데, 나는 그만 손 옹의 운명을 얘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P교수는 “에이, 그래도 손 옹은 우리나라 최고의 지관인데 자기 앞날도 모르겠소. 이미 천하의 명당으로 묏자리도 잡았다는 데. 정말 못 갈 거면 말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 말을 반신반의하는 P교수에게 말했다. “그럼 그냥 통과합시다. 내가 한 말 못 들을 걸로 하고요”

나는 그날 손 옹에게 “남들에게는 대통령 될 자리를 잡아주시던데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어떤 자리로 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손 옹은 “좋은 자리가 하나 있긴 한데 자식이 알아서 잘 쓸지는 모르겠습니다”라며 말을 흐렸다. 그의 얼굴에는 왠지 수심이 가득했다.

6월 20일, 지리산의 천년사찰 화엄사. 그날 손 옹은 공적비 제막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달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당대 국사(國師)였고 세간을 호령했던 손 옹의 묏자리는 두고두고 회자가 되었고,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 답사코스가 됐다.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손 옹이 묻힌 곳이 명당인가에 대해 이야기가 분분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땅의 지기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땅에 사람이 들어가야 완성이 된다. 그리고 자손이 자주 찾아주어야 한다. 아무리 양지바르고 자리가 좋아도 자손의 발길이 끊긴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어찌 명당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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