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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38. 미국 H신문사 걸프전 예언 보도

입력 : 2016-09-05 04:40:00 수정 : 2016-09-04 18: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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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을 하는 사람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1년 때로는 10여 년이 소요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자기 영혼을 담은 창작물이 무단으로 침해당했을 때는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과거 무단 복제한 영화나 음반, 일명 ‘해적판’이 나돌아 문화 · 예술인들의 창작 의지를 꺾는 일이 빈번했다. 그런 창작과 나의 예언이 연결되는 일이 있었다.

가짜 차길진 사건 이후 나는 한 동안 종교와 집필에만 힘썼다. 그러던 중 틈틈이 원고지를 메워왔던 작업이 좋은 결과를 냈다. 1989년 월간중앙 복간 1주년 기념 700만 원 고료 논픽션 공모에 내가 쓴 <빨치산 토벌대장 車一赫 수기>가 당선되었다. 그 수기는 아버지께서 남기신 빨치산 토벌 작전기록과 일기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재조명한 글로, 심사위원들은 ‘빨치산과 토벌대 모두가 한 시대의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었음을 주제로 하였기에 당선작으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그 동안 일방적인 진술과 기록으로만 일관해 온 ‘빨치산 문학’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좋은 평가였다.

그런데 이듬 해 8월 나는 황당한 소식을 들었다. 뉴욕의 H신문사에서 작가인 나와 한마디 상의 없이 ‘빨치산 토벌대장의 수기’를 연재했던 것이다. 신문 연재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이 소식을 듣게 된 나는 미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한국에서 20년간 출판계에 종사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 언론인으로 활약 중인 C였다. “내가 그 책의 저자인데 어찌해서 승낙도 받지 않고 무단 연재했습니까” 내가 그 이유를 추궁하자 그는 황당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연락을 취하려 했는데 도저히 알 길이 없었습니다. 승낙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전재한 잘못을 인정합니다만 영리를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단순히 독자들에게 좋은 글을 전해주기 위한 생각뿐이었습니다. 또 뉴욕에서 가장 큰 신문에 글이 게재된다는 것은 보람있고 작가로서는 오히려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초청장을 보낼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두 달 동안 그에게서는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이에 나는 정식으로 미국의 H신문사에 저작권 침해소송을 제기했다.

국제저작권협약에 따라 한국인이 미국인을 대상으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첫 번째 사례를 기록했다. 작가의 이의 제기에 대해 변명만 늘어놓는 신문사의 오만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과연, 미국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에서 이길 수 있을까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역사의 증언자로서 물러설 수 없었고 앞으로 있을지 모를 국내 작가의 침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손해배상 청구를 하니 차후 문제는 변호사와 연락하라’는 내용의 팩스를 보냈다. 그러자 얼마 후 미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우선 만납시다. 만나서 얘기를 해봅시다” C는 부랴부랴 초청장을 만들어 보냈지만 나는 거절한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가지 않았다.

몇 달 후 나는 사전연락도 없이 불쑥 뉴욕의 신문사로 찾아갔다. C와의 첫 대면. 그는 뒤통수를 맞은 듯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잔뜩 긴장한 그에게 내가 부드럽게 대화로 풀어가자 차자 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대화중에 내가 “당신 지갑에 00달러가 있군요”라고 정확하게 액수를 맞추자 C는 지갑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같이 배석했던 지국장을 비롯하여 신문사 관계자들은 신기하다 여기면서도 마치 디너쇼의 마술정도로 생각하며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당시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걸프전 발발이 언제 일어나는 가였다. 연일 중동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신문사 지국장은 가볍게 “언제쯤 전쟁이 터질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아마 1991년 1월17일 경에 일어날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내가 웃으며 말을 하자 신문사 관계자들은 주의 깊게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1월 17일자 세계 모든 신문의 톱뉴스는 ‘걸프전 발발’이었다. 그날 뉴욕 H신문은 걸프전과 함께 나의 예언 사실을 보도했고, 소문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내가 묵었던 스탠퍼드 호텔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언론인 C와는 악연으로 시작했지만 후에 좋은 인연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 당시 뉴욕에는 한인대상 라디오 방송국이 없었다. 나는 뉴욕 교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뉴저지를 중심으로 한‘라디오 1480’이름의 한인대상 방송국 설립에 나섰고, 이 때 C가 큰 역할을 해주었다. 내가 미국을 떠난 후 방송국은 관리문제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어렵게 만들었던 한인 라디오방송국이라 지금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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