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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36. 얼굴에 나타난 이보(耳報)의 삶

입력 : 2016-08-29 04:40:00 수정 : 2016-08-28 18:3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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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상’을 보면 주인공은 천하의 관상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아들의 죽음은 어찌하지 못했다. 영화를 보면서 신안(神眼)이 열린 관상가라면 미리 대비를 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들이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닌가 생각을 했다. 작가들이 그리는 상상 속 관상과는 달리 얼굴을 성형한다고 상(相)이 바뀌지 않지만 관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관상 전문가는 말한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는 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관상가가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분인 B선생과 우연치 않게 인연이 닿게 됐다. 17세 때 일이다. 내겐 죽마고우 같은 친구가 있었다. 친구 아버지는 서울 광교 부근에서 한의원을 하시고 있었다. 친구는 아버지를 따라 한의사가 되는 꿈을 갖기보다는 노는 걸 더 좋아하고 기이한 행동을 잘하는 괴짜 친구였다. 하루는 “내일 아침 종로4가 평화극장 앞으로 가야하니 새벽 다섯 시까지 우리 집에서 보자” 친구의 뜬금없는 말에 “새벽 다섯 시? 무슨 일인데”라하고 물었으나 친구는 웃으며 “너 관상 잘 보는 B씨 알지? 고등학생은 안 봐준다고 해서 스무 살이라고 속이고 네 것까지 접수해 표를 끊었으니까 꼭 가야 해 알았지”

당시 나는 억울한 일에 휘말려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강제 전학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친구는 내 마음을 알았던지 깜짝 이벤트를 마련한 것이었다. 통행금지가 풀리자마자 만나 친구 집으로 가서 미리 준비한 양복으로 갈아입고 관상가 B선생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해 보니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도 사람이 많았다. 새벽에 관상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보니 마치 지금의 후암선원 같았다.

접수 순서에 따라 나는 B선생 앞에 앉았다. 그는 생년월일은 물어보지 않고 얼굴만 쳐다봤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은 매처럼 날카로웠다. 보는 품새에 눌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공무원이 될 상은 아니야, 관운이 있을 상도 아니야, 군인이나 법관이 된다는 생각은 아예 접어라. 그렇다고 큰 사업가가 될 상도 아니고 종교가가 될 상도 아닌데... 너 아직 학생이지” 나는 뜨끔했다. 역시 유명한 관상가라 양복을 입어도 학생인 것을 금세 맞추나보다 싶었는 데, B선생의 말이 “학생은 말이야, 학생은 나중에 이보(耳報)하게 될 거야.”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이..보요? 그게 뭔데요” 그는 대답해주기 귀찮다는 듯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말했다. “귀 이(耳)에 알릴 보(報), 귀신이 귀에서 가르쳐준다고. 알았으면 그만 나가봐”

새벽에 잠까지 설쳐가며 한참을 기다려 본 관상이 고작 귀신이 귀에서 가르쳐주는 관상이라니. 기가 막혔다. 뒤이어 들어간 친구는 더욱 가관이었다. “너도 학생이지?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겠어. 빈한한 상이야” 소문난 부잣집 아들을 보고 가난뱅이라니. 엉터리도 보통 엉터리가 아니었다. 관상가의 집 문을 나서자마자 우리는 허탈해졌다. 한동안 침묵 속에 헛웃음만 나왔다.

말없이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먹다가 친구는 씩씩거렸다. “우리 집이 얼마나 부잣집인데 평생 가난뱅이로 산다니. 그런데 우리가 왜 이 짓을 했지” “나는 어떻고. 이보가 뭐냐? 귀신이 귀에서 가르쳐준다는데 생전 그런 헛소리는 처음 듣는다” 그 말에 친구도 나도 해장국집이 떠나가라 미친 듯이 웃었다. 새벽부터 귀신에 단단히 홀린 기분이었다.

안타깝게도 관상가 B선생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친구네 한의원은 그 후 점차 환자가 줄더니 결국 문을 닫았다. 친구는 남은 재산을 정리해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옛날과는 달리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나 역시 영혼들의 얘기를 들어주는‘이보(耳報)’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어찌됐건‘이보(耳報)’란 말은 B선생으로서는 최선의 표현을 한 셈이었다. 세월이 지나 다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험난한 길을 가겠군요”라는 말을 하였다.

‘출세하는 이유는 골상에 달려있고, 말년에 행불행은 심상에 원인이 있다.(出世之由因骨相 末路之由因心相)’는 말이 있다. 아무리 얼굴의 상이 좋아도 심상 좋은 것만 못하다는 얘기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이 말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때는 머리가 좋아 출세가도를 달리던 사람들이 마음보를 잘못 사용하여 말년이 불행의 길로 가고 있는 듯 보인다. 심상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보면 마치 운명이 정해진 듯 보여도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관상은 어쩌지 못하지만 심상은 노력으로 고칠 수가 있지만, 결국 자기 운명은 자기가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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