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월드

검색

[차길진과 세상만사] 14.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입력 : 2016-06-08 04:40:00 수정 : 2016-06-08 11:35:00

인쇄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지난 달 24일 오전 진해군항에 일본 해상자위대의 구조함과 잠수함이 입항했다. 이들 군함들은 진해와 제주도 일대에서 ‘2016 서태평양 잠수함 탈출 및 구조훈련(Pacific Reach 2016)’에 참가하기 위해 진해군항에 닻을 내린 것이다. 일본 군함은 항구에 진입하면서 함미에 욱일기(旭日旗)를 나부꼈다. 일본 해상자위대가 욱일기를 달고 입항한 것에 대해 시민사회는 물론 진해시민들까지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였다.

일본 해상자위대가 욱일기를 달고 우리 영토로 입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7년에도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함정 3척이 인천항에 입항한 적이 있다. 이때 인천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욱일기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했다.

욱일기를 단 일본해상자위대의 입항에 대해 우리 해군 관계자는 “함정은 국제법상 자국 영토로 간주되어 한국 해군이 일본에 욱일기를 달지 못하게 하는 건 주권침해에 해당한다”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욱일기에서 느끼는 감정이 국제법 테두리 안에서만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욱일기는 과거 일제의 육군과 해군의 상징이었다. 1945년 패전 후 연합국 총사령부(GHQ)에 의해 사용을 일체 금지 당했다가, 1952년부터 일본 해상자위대에서 욱일기를 슬그머니 부활시켰다. 역사가들은 아마도 미국의 묵인이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렇게 인천항에서, 진해항에서 욱일기 입항을 반대했던 시민들 뒤로 서울시내에 욱일기가 있다면 그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도 매일 이용하는 지하철 역 안에 있다면 말이다. 며칠 전 지인이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 역(驛)으로 나를 안내했다. 지인은 역사 지하1층 남자화장실 입구 바닥을 가리켰는데 낯익은 문양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둥근 원형에 12조의 햇살무늬가 새겨져 있는 욱일기 문양이었다. 역무원은 공사 관계자가 바닥이 허전하여 별 생각 없이 문양을 넣었을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세히 보면 역내에 있는 문양이 욱일기와 100% 똑같지는 않다. 하지만 누가 봐도 욱일기라고 말할 정도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미디어시티 역(驛)은 1930년대부터 만주방면으로 군수물자와 군대를 실어 나르는 발진 기지로 병참 시설과 대규모 병영이 있었던 곳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당시의 일본군 관사가 디지털미디어시티 역(驛)을 가로질러 상암동 아파트단지 내에 복원되어 있고 근린공원으로 미화되고 있다. 더구나 문화재청은 당시 허물어져 가는 그 건물을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다하여 30억 원의 복원보존 소요비용을 아파트 분양가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즉, 국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일제의 잔재를 보존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가치가 있다던 관사는 지금은 왜 문이 굳게 닫혀있을까?

그 당시 일본군 관사 복원에 찬성했던 교수는 “긍정의 역사만 역사가 아니다. 한반도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순수한 건축양식의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했다는데 말은 그럴 듯하지만 건물의 용도와 국민의 정서조차 따지지 않고 등록문화재로 만들려 했던 학자의 외골수의 사고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지난 2013년 미국 뉴욕시가 일본 욱일기 문양을 광고 디자인으로 사용한데 대해 한인사회가 강하게 항의를 했다. 이에 뉴욕시는 “뉴욕시의 문화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했을 뿐 광고 디자인이 일본 욱일기를 의도할 의사는 절대 없었다”며 공식 사과했고 문제의 디자인은 다시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세계적인 스포츠회사도 욱일기를 모티브로 운동화를 만들어 판매하다가 불매운동을 벌이자 사과를 했었다. 국민들이 욱일기에 이처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일본이 틈만 보이면 과거사를 왜곡하고 전범국가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면서 수많은 아시아인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군국주의를 교묘하게 포장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대문형무소를 몸으로 지켰던 사람으로서 디지털미디어시티 역(驛)내 욱일기 문양을 보면서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그저 방관만 했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인근 일본인학교에 드나드는 일본인들이 이것을 보고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마지막 조선총독부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가 떠나면서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남긴 말이 문득 떠오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 된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이기를 빌면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연예 스포츠 라이프 포토

연예
스포츠
라이프
포토